이번이 2015년에 내보내는 마지막 논평이다. 인위적인 구분이라 해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전혀 무용하지는 않을 터. 지난 한 해를 잠시 뒤돌아보는 것은 어찌 보면 형식이지만 또한 성찰이고 (자기) 비판이다.
올해 초 우리는 건강과 보건의 렌즈로 한국 사회를 전망하면서 네 가지를 지적했다. (☞관련 기사 : 건강과 복지 후퇴에 맞설 준비) 재정 압박과 보건 복지의 ‘국지적’ 긴축, 끈질긴 의료 산업 성장 전략, 공공 부문에 대한 압박, 그리고 보건 복지 요구의 증가가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크게 빗나가지 않았을 뿐더러 대부분이 아직 진행되는 중이다. 점쟁이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경향성이 굳어져 구조가 되었다. 장관이 바뀐다고 달라질 것이 아니며, 현실 정치권력의 입맛을 따르는 것도 아닌, 이미 단단한 틀! (미리 말하면, 내년에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도 있었다. 그 중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메르스 사태가 두드러진다. 한 해가 끝나가는 며칠 전에야 공식 종료 선언을 할 수 있었으니, 2015년은 ‘메르스의 해’였다고 해도 과장이라 할 수 없다. 새로운 대비 태세를 만드는 일은 해를 넘길 참이다.
하지만 메르스조차 큰 틀에서는 예외라 하기 어렵다. 흔히 신자유주의 국가라고 부르지만, 지난 한 해 국가는 그 말 그대로였다. 국가는 (어떤 곳에서는) 계속 후퇴했고, 또한 (어떤 곳에서는) 계속 진입했다. 막상 국가가 제 역할을 해야 하는 곳에서는 국가를 찾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없는 곳에서는 가장 강력한 국가의 모습을 과시했다. 종잡을 수 없지만, 한편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메르스 사태에서 국가는 사라졌다(그리고 다른 곳곳에서 사라졌거나 사라지려 하고 있다). 누적된 결과로서의 방역 체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으며, 리더십의 공백 상태에서 사람들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한심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국가의 공백은 책임 문제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누구도 공적으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고 지금도 그렇다. 단순한 행정적, 법률적 책임 회피로 볼 일이 아니다. 책임은 일관되게 개인에게 분산되고 또한 이전되는 중이다. ‘국가 책임의 민영화’라고 해야 정확하다. 메르스와 세월호 사건은 여기서도 판박이로 닮았다.
모습을 감추고 이름을 숨겼던 무능한 국가가, 의료 산업화와 영리화에서는 돌연 스스로를 드러낸다. 제주도에 영리법인 병원을 허용하는 것을 보면 같은 정부가 맞나 싶다. 치밀하고 신속하며 체계적이다. 부처 사이의 협조와 지방 정부와의 협력도 놀랍다.
이 문제만큼은 서로 맡겠다고 경쟁하는 풍경도 기이하다. 대통령이 책임자로 나서 몇 번을 채근하고 압박을 가했으니 그럴 것이다. 여당과 경제 부처, 보건복지부와 지방 정부까지 나섰으니 전공을 다투는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들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시장 실패를 교정하는 고전적 역할은 진작 넘어섰고, 영리 병원과 의료 산업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고 나섰다.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시장의 규칙을 조성하는 것을 제 역할로 자임한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이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 가지 더. 꼼수와 뻔뻔함, 가치의 뒤집어짐(전도)도 피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국가 개입의 한 특징이다. 그 말썽 많았던 담뱃값 인상은 차라리 폭력이다. 말로는 건강 증진 운운하지만, 재정 수입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결과적으로 다시는 비슷한 정책을 시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건강이란 명분은 일회용품으로 소모된 것이다.
지난 한 해 메르스와 영리 병원, 담뱃값 인상이 선생이었다. 건강과 보건을 통해 나타난 징후는 분명 신자유주의 국가의 어떤 극단이라 할 만하다. 모든 사태를 한 가지로 환원할 수 없지만, 이것 없이 2015년을 성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안타깝지만, 추세는 당분간 꺾이지 않을 것이다.
사토 요시유키가 쓴 <신자유주의와 권력>(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몇 군데를 따오는 이유다. 2015년을 보내면서, 무엇을 다시 살필 것인가 생각하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 주권을 생산한다. (…) 경제 또는 경제 성장이야말로 국가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때 정치적 심급은 경제적 심급에 대해 그 자율성을 잃고 경제에 의해 침식당하게 된다.” (31쪽)
“신자유주의는 공공 투자, 사회 보장 같은 케인스적 방식으로 시장 경제의 메커니즘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장의 조건들, 즉 시장의 존재 조건인 규칙들과 제도들과 같은 ‘틀’에 개입함으로써 경제 과정을 조정하려고 한 것”이다. (41쪽)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규범을 내면화해 자기 관리를 하는 규율적 주체는 오히려 자기를 투자의 대상으로서 철저하게 경영하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즉 시장 원리를 내면화하고 그것에 기초해 자기를 경영하는 경제적 주체로 치환”한다. (54쪽)
어둡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을 다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필연으로 저항할 수 있고 사회를 변형할 수 있는 주체다. 메르스를 계기로 시민의 권리가 드러나고, 영리 병원 때문에 건강과 복지의 공공성, 윤리성이 반증되는 역설, 또는 변증법. 그것이 의미이고 가치가 아닌가.
지난 한 해 ‘서리풀 논평’을 성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애독자 여러분 모두 행복한 새해를 맞기를 기원한다. 다른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즐겁고 보람 있게 살만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