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병원 체인’을 허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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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법인’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어려운 것은 회사, 그중에서도 주식시장에 상장한 큰 기업의 정체다. 1퍼센트도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지고 주인 노릇을 하는 재벌을 보면, 법인이란 무엇이며 또 자본주의가 말하는 ‘소유’는 무슨 뜻인지 난감하다.

어디 회사만 그런가. 의료법인, 학교법인, 사회복지법인 등은 적어도 겉으로는 ‘공익’을 내세운다. 많은 ‘비영리’ 법인이 모두 비슷하다. 이들이 여러 가지 세제 혜택을 받거나 소득 공제를 받는 것은 그 활동이 공익 또는 공공성을 실현한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법인이라는 형식만으로 공익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 많은 ‘사학 비리’를 보라. 개인이 아니라 학교법인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다. 얼마 전 한 신문에 보도된 한 사립대학의 실상을 보면, 이 땅에서 공익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 수 있다 (바로가기). 그 추악한 이면 중에서도 학교가 상품이 되어 결국 거래 물품으로 바뀐 꼴을 잘 봐두자.

 

지금 법인의 이름으로, 그리고 공익의 이름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통로가 만들어질 참이다. 의료법인의 인수합병 이야기다. 오는 수요일(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의료법을 개정해 의료법인의 인수합병을 허용할 것이라고 한다.

4월 말에 보건복지위에서 여야 합의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고 하니, 별일이 없으면 법사위원회도 쉽게 통과할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지만(바로가기), 국회와 의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여당은 몰라도 야당(들)의 태도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의료 영리화 반대를 공언했고, 바로 지난 총선에서도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건 영리화와 무관한가? 이번 법 개정이 공익성을 강화하는 것이면, 그렇다고 당당하게 설명하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슨 심오한 속뜻이 있으면 알려 달라.

 

의료법인의 인수합병을 왜 추진하고 왜 반대하는가?

대한병원협회를 비롯해 법 개정을 추진하는 쪽에서 내세우는 대표 논리는 이렇다. “경영상태가 건전하지 못한 의료기관이 파산 시까지 운영할 수밖에 없어 의료서비스 질 저하 및 경영악순환으로 인한 지역 내 의료제공에 문제를 발생한다.”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런 뜻이 아닌가 싶다. 재정이 부실한 병원의 ‘주인’이 남은 재산이 아까워 내놓지 않으니, 병원을 합법적으로 팔 수 있도록 해주자는 논리다. 다른 개인 재산과 마찬가지로 거래를 허용하자는 뜻인 모양이다.

 

의료법인의 인수합병을 허용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의료민영화저지와 무상의료실현을 위한 운동본부’가 법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 글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바로가기).

 

 

 

구구절절 근거들. 어떤 사람들은 ‘기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런 정책은 내용보다 맥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곳의 어떤 병원이 인수합병에 나설 것이며,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떤 병원이, 왜, 인수합병의 대상이 될까?

‘건실한 퇴출구조’는 명분일 뿐이다. 실제 운영이 어렵고 재정이 부실한 병원을 누가 인수하고 합병하려 하겠는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다. 지금은 몰라도 곧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경우.

 

사실 우리가 하는 질문은 간단하다. 누구를 위한 인수합병 허용인가? 양쪽 병원의 주인이 이익을 보는가, 아니면 지역주민에 도움이 되는가? 사회적으로는 무엇이 좋아지는가? 더도 덜도 아닌, 이익의 배분을 둘러싼 정치적 질문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병원을 사고파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 환자와 지역사회를 내세우지만, 이들은 이익의 밑천을 감당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또 다른 불평등이 기다리고 있다.

 

‘현실론’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부실 병원은 지금도 음성적으로 사고팔지 않느냐는 논리가 현실론의 핵심이다. 영리병원을 허용하자는 주장과 논리의 얼개가 같다. 어차피 영리를 추구하는데, 차라리 허용하고 더 투명하게 감시하자는 논리.

이런 현실론은 항상 앞뒤를 바꾼다. 불법과 음성이 판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다. 부실 의료법인이 경영 때문에 과잉 진료와 불법 청구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것을 막고 감시하는 것이 정부와 공기관의 당연한 의무이고 책임이다.

불법 거래가 만연해 있으니 법을 고쳐 달라는 억지에 이르면 기가 막힌다. 공공연하고 당당하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현실에서도 현실론에 굴복할 수는 없다. 부실 법인을 퇴출할 때 쓰라고 미리 정한 원칙이 있지 않은가. 공익과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 법이 정해 놓은 절차를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제도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의료법인을 청산하면 재산을 국가나 동일 목적을 가진 법인으로 넘기는 것이 원칙이다. 소관 지자체의 승인이 엄격해서 사실상 청산이나 인수·합병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공익과 공공성에 맞으면 지자체가 왜 막겠는가.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하면 병원을 인수해도 된다.

법이 개정되면 의료법인 병원을 사고팔 수 있으니 곳곳에 ‘체인’ 병원이 등장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OO병원’ 수원점, 전주점, 울산점 등의 이름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 경영회사가 따라붙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비전과 ‘미션’은 무엇이 될까?

박근혜 정부의 투자활성화 대책에 따라 이미 부대사업을 할 수 있으니, 인수합병까지 가능하면 더 많은 돈을 버는 데에 날개를 달게 된다. 체인 병원이 건강식품, 쇼핑몰, 헬스장, 호텔, 의료기기와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을 보듯이 환하다.

부대사업이 붙든 아니든 결국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이윤, 투자 회수, 배당, 자본 축적, 재투자,…그 어떤 말을 써도 마찬가지다. 그 돈은 누가 내야 할까?

 

선거를 전후해 모든 정당이 ‘민생’을 말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앞으로 민생을 유일한 방향으로 삼겠다고 공언하는 당도 있다. 그들에게 묻는다.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그 민생인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의료법인 인수합병에는 일언반구 말이 없는가?

그렇지 않아도 그들의 ‘민생’을 의심하고 ‘민생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민생에서 ‘민(民)’이 대기업과 경제적 강자, 유력자, 상류층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런 민생은 선동이고 호도다. 수요일의 국회 법사위, 그리고 민생을 말하는 정당과 소속 의원들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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