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우리는 거지다.”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지원받지는 않았지만, 벧엘선교복지재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은 것은 사실이라며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의 추선희 사무총장이 한 말이다. 어버이연합은 전경련으로부터 ‘뒷돈’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떤 집회를 열라는 청와대 행정관의 ‘지시’도 따랐다.
세월호 특별법 반대, 한일 ‘위안부’ 협상 찬성, 심지어 김무성, 유승민 의원의 사퇴 촉구까지. 이들은 ‘관변’ 단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한 사람’을 비호해왔다. 야당은 진상 조사 태스크포스(TF) 팀을 발족하고, 전경련-청와대의 커넥션을 밝히겠다며 벼르고 있다.
비영리 민간 단체는 본질적으로 운영 자금을 외부로부터 조달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지원에는 언제나 일정한 통제가 동반된다는 점에서, 지원의 주체와 통제의 범위는 중요하다. 단체의 지향과 사회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보건의료 영역의 대표적 비영리 민간 단체인 환자 단체는 ‘시민 사회 단체’이자, ‘이해 당사자 단체’다. 노바티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글리벡 투쟁’을 이어나갔던 한국백혈병환우회는 전자에 가까웠지만(☞관련 기사 : 보건의료 분야 전문가들에게 환자로서 부탁합니다), 후자에 가까운 환자 단체의 활동 역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이해 당사자, 특히 취약한 집단의 입장은 대변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이러한 입장과 활동의 결과가 ‘공적 가치’에 부합하는지는 평가될 필요가 있다.
환자 단체들은 정부의 의약품 연구 개발 지원 결정, 시판 허가 및 급여 결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다. 그로부터 정부 정책은 영향을 받고, 때로는 기존 결정이 번복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의 안전하고 효과적인 의약품 사용’, ‘건강 형평성과 건강 정의’라는 가치가 침해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약품의 신속 허가나 허가 기준 완화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고, 환자 단체가 잘 조직되지 못한 질병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욱 소외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환자 단체의 활동이 제약사의 정치경제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 대학교의 데이비드 휴즈(David Hughes)와 브라이언 윌리엄스-존스(Bryn Williams-Jones) 연구 팀은 환자 단체 CPC(Coalition Priorité Cancer)에 대한 사례 조사를 통해, 제약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환자 단체가 의약품 급여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이고자 했다. (☞관련 자료 : “Coalition Priorité Cancer and the pharmaceutical industry in Quebec: conflicts of interest in the reimbursement of expensive cancer drugs?”)
CPC는 2001년 설립된 퀘벡 주 소재 환자 단체로, 항암제 급여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저자들은 이 단체의 웹사이트, 주 의회에서의 발언, 개최한 행사 관련 문헌, 신문 기사 등을 검색 후 분석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CPC는 예산의 60~65%를 제약사로부터 조달하고 있었는데, 이는 선행 연구에서 보고된 다른 환자 단체의 경우(6~30%)와 비교했을 때도 월등히 높은 수준이었다.
둘째, 2011~2012년 CPC에 자금을 지원했던 13개 제약사들은 모두, 기존에 비급여 결정된 항암제 또는 추후 급여 평가 예정인 항암제의 생산사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이들이 생산하는 항암제의 상당수가 재평가에서 급여 결정을 받았다.
셋째, 선행 연구에 따르면, 제약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의약품 허가 및 급여 결정 과정의 단축과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반면, 지원을 받지 않는 단체들은 “규제 및 안전 기준 강화”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CPC는 전자의 입장이었다. 특히 전이성 유방암 치료 목적의 아바스틴 사용에 대해 퀘벡 주 의료기술평가기구(INCESSS)가 비급여 결정한 것을 비난하면서도,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이 안전성과 효능 근거 부족을 이유로 사용허가 취소를 권고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넷째, 선행 연구에서는 환자 단체들이 제약사나 정부에 “의약품 가격을 인하하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CPC의 경우, 정부에는 제약사가 제시한 가격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제약사에는 가격을 인하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영국과 유럽의 제약산업협회는 회원사가 이해 당사자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경우 웹사이트와 연보를 통해 이를 공개하도록 하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 반면 환자 단체들은 이런 지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의 환자 단체는 약 25%만이 제약사의 자금 지원 사실을 공개하고 있다. CPC의 경우, 자금을 지원하는 제약사의 목록 외에 정확한 금액이나 사용처는 공개하지 않고 있었으며, 해당 제약사의 로고를 공식 문서에 인쇄함으로써 일종의 홍보를 해주고 있었다.
환자 단체는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환자와 그 가족에 정보와 지지를 제공하며, 질병의 예방 및 치료를 위한 정부 정책에 관여하는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이래 캐나다 정부는 재정 제약을 이유로 환자 단체에 대한 지원을 감축했고, 환자 단체 입장에서 이를 보충할 가장 손쉬운 재원은 제약사였다. 제약사 입장에서 환자 단체는 “질병에 인간의 얼굴을 입혀주고, 제약사의 주장에 신뢰를 더해주는”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비영리 민간 단체인 환자 단체가 그 사회적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공공(정부)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어버이연합의 사례를 보면, 단순히 정부의 자금 지원이 비영리 민간 단체의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정부의 ‘관료적’ 통제나 자본에 의한 통제가 아닌, ‘사회적’ 통제만이 비영리 민간 단체의 ‘공공성’을 지킬 열쇠다. ‘공공’은 단지 ‘정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선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