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변형생물체(GMO)가 다시 말썽이다. 몇 가지 일이 겹쳤는데,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며칠 전 농업진흥청이 유전자변형 벼를 연구 개발하고 있는 것을 적극 변호하고, 이에 반대하는 농업, 환경, 시민, 소비자 단체는 큰 규모의 집회를 열었다(바로가기). GMO가 환경과 건강, 농업에 유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런 행동의 논거다(가장 최근의 글로는 다음을 참고).
GMO를 찬성하는 주장도 여전히 강하니 혼란스럽다. 10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환경단체인 그린피스에게 GMO 반대를 중단하라고 요구한 것도 이에 속한다(그린피스의 반응을 포함한 좀 더 자세한 기사 바로가기). 한국의 어떤 과학자 단체는 “일부 반대론자들이 유전자변형생물체(GMO)에 대한 근거 없는 우려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도전이며 방해 행위”라고 대놓고 비난했다(http://bit.ly/29eALal).
GMO 표시기준을 규정한 법안(고시)을 개정하는 문제도 시끄럽다. 식약처가 ‘유전자변형식품등의 표시기준’을 바꾸려고 하는데, 사실은 GMO 표시제를 후퇴시키는 것 아니냐는 것. 간장, 식용유, 당류, 증류주에 대해서는 GMO 표시를 제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NON-GMO’와 ‘GMO free’ 표시를 규제하는 내용을 담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마침 GMO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GMO 표기를 둘러싸고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시작은 작은 주인 버몬트 주. 이달(7월)부터 이 주 안에서 유통되는 모든 식품에는 GMO 표기가 의무화되었다. 거대 식품회사의 반대를 이기고 법 시행에 성공했다는 점도 이목을 끌지만, GMO의 본국에서 틈이 생겼으니 중대한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전과 이후의 경과는 생략하지만, 일이 전국으로 번져 의회가 나섰다는 것은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일주일 전, 미국 상원 농업위원회가 미국 내 전역에서 GMO 표기를 의무화하는 법안에 합의했다. 버몬트 주가 정한 것보다 후퇴한 안이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GMO 표기 의무화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은 분명하다(기사 바로가기).
몇 가지 일의 양상은 다르지만, 우리는 GMO가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이미 많은 사람이 GMO를 기르고 먹는 것, 예를 들어 미국 안에서 시판되는 가공식품은 75% 넘게 GMO를 포함하고 있다는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바로가기). 건강과 환경에 유해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 국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GM 식품은 안전 평가를 통과한 것으로, 사람의 건강에 해를 끼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세계보건기구의 ‘결론’도 병존하는 것이 현실이다(바로가기).
건강과 환경 효과, 특히 장기적 전망에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실은 당연하다. 실용적으로는 GMO, 건강, 환경을 하나로 뭉뚱그려 정의할 수 없고, 하나하나 모두 개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 콩과 감자가 다르고, 어떤 조작을 어디다 했느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알레르기나 발암성이 문제라면, 어떤 사람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서도 효과가 다르다.
더 난제는 건강과 환경 변화가 여러 요인과 과정을 거치는, 전형적으로 복잡한 현상이라는 점이다(이 대목에서 ‘복잡계’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한두 가지 요인, 그리고 블랙박스를 거친 결과만 가지고 결론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논쟁도 금방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딜레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행동을 결정하고 실천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기술적 논쟁에 참여하는 대신, 구체적 행동을 규정하는 (프레임으로서의) 가치와 원리에 기초를 두고자 한다. 가치와 원리는 GMO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며, 때로 기술적 판단과 행동 방침을 정하는 원리로도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확실하지 않을 때 채택할 것인가 기각할 것인가는 가치와 원리가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가치와 원리의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GMO인가’로 요약된다. GMO는 지금 그대로 단면적 현실인 동시에 그 ‘지향’은 계속 변화하는 역동적 현상이다. 이 질문에 어떻게 (그리고 실천적으로) 답하는가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누가, 왜 GMO가 필요하며, 왜 더 많은 GMO를 원하는가?
이를 GMO의 ‘정치경제’라 부르자. 왜 정치경제라 하는지, 농업진흥청의 논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미국·EU가 GMO 연구 등으로 개발한 생명공학 특허를 전 세계의 75% 가량 보유하고 있고, 중국과 일본이 GMO 벼의 안전성 검사를 통과한 상황에서 우리도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기사 바로가기).
과학자들이 모였다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주장도 큰 차이가 없다. “농업혁신의 근간은 첨단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하여 지구온난화에 의한 기후변화를 극복하고 우리 농산물의 품질과 생산성을 향상하여 지속가능한 고소득 농업경영을 달성하는 것…(중략)…우리는 필연적으로 농업분야에서 생명공학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다국적 기업들의 종자에 의존하는 농업 종속국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 과학계와 정부는 생명공학에 의한 창조농업혁신을 위한 특단의…”(바로가기).
한국 내에서 GMO의 동력이 이렇다. 산업과 경제, 생산성과 경쟁이 ‘국민국가’와 결합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에 기초해 있다. 이 땅 누구에게 GMO가 왜 필요한가? 식품(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본질적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산업으로 봐도 어떤 사람 중심의 가치도 찾을 수 없으니, ‘진공’ 상태다. 농업 발전과 혁신, 생산성을 말하지만, 농민의 삶과 농업 발전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국제적 동력도 마찬가지다. 더 많고 더 좋은 식품을 위해 GMO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세계는 이미 모든 인류를 먹이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한다(바로가기). 인구가 늘어나고 소득이 올라가면 훨씬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있다. 궁색하다. 30년, 50년 뒤를 예측하는 것도 그렇지만, 많이 양보해도 GMO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굶주림의 핵심 원인이 생산이 아니라 분배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빈곤과 잘못된 사회경제체제, 분쟁 등이 정말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때, GMO가 문제해결에 기여했다는 어떤 근거도 부족하다. 앞으로는 GMO를 둘러싼 정치와 경제, 국제 메커니즘, 그리고 다국적 기업과 그들의 행동이 굶주림과 분배를 개선할 수 있을까? 단언하지만, GMO의 세계 질서로는 어림도 없다.
국내, 국외의 GMO 표기를 둘러싼 논란도 정치경제로 해석해야 한다. GMO 시장이 확대되거나 위축되는 것, 수입이 쉽거나 어려운 것, 그리고 그렇게 구조와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정치경제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누구에게 무엇이 유리하고 불리한가, 어떤 권력과 힘이 작용하는가, 꼬박꼬박 물어야 한다.
정치경제로 해석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우선, 드러내는 것이 곧 실천이고 행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GMO를 둘러싼 과학적 불확실성은 GMO의 정치경제를 은폐하는 데에 기여한다. 건강과 환경을 두고 벌이는 논란은 GMO를 기술과 데이터 분석, 미시적인 인과관계로 좁혀 놓기 마련이다. 결론을 내기 어려울수록, 수렁에 빠지기 쉽다.
적어도 당분간은 더 많고 확실한 과학이 가능하지 않다면, 과녁은 드러나는 정치경제다. GMO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더 많이 드러내야 하고, 드러내면 달라진다. 무엇을 위한 GMO인지, 누구를 위한 GMO 표기인지를 따지자. 그리고, 애써 답을 피하려 하는 그 근본 질서를 불러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