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 여름의 폭염은 곧 누그러질 것이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전기료 누진제 시비는 한참 더 갈 것으로 보인다. 겨울에도 전기료 걱정을 해야 한다지 않는가. 방향은 다를 터이나, 이 논란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 여름은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기료 누진제가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것을 이해한다. 더 쉽게 더 싸게 전기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자칫 ‘전기중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이뿐인가, 더 많은 전기 수요는 지속 가능성이 떨어지는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것이다. 이건 곤란하다.
누진제를 없애거나 완화하면 누가 가장 큰 혜택을 보는가도 문제다. 1만 원의 요금에도 벌벌 떠는 서민의 부담은 당연히 줄여야 하지만, 요금제를 잘못 설계하면 효과는 엉뚱한 곳으로 돌아간다. 아예 에어컨도 없는 가정이 얼마나 혜택을 볼 수 있겠는가.
한국전력을 비난하는 것도 마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다. 요금 결정권은 누가 쥐고 있는데, ‘도덕적 해이’를 빌미로 삼아 한쪽에서는 전기 민영화 논의를 부채질한다. 전기를 ‘시장’에 맡기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몰고 갈 참인가.
그래도 이번의 전기료 논란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중요한 기회다. 단지 지금의 전기요금 구조나 생산원가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의 의미와 배분의 원리를 묻자. 이 시대 에너지의 사회적, 공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에너지의 사용과 비용 부담에는 어떤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이 시대 에너지는 삶의 질이자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전기와 에너지라고 하면 여전히 ‘동력자원부’나 ‘산업자원부’, ‘산업통상자원부’라는 부처 이름이 익숙하지만, 지금 에너지는 의식주는 물론이고 앎, 이동, 건강 등 그 모든 것과 밀접하다.
그뿐인가,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그 사실이 다시 삶에 영향을 미친다. 산업과 자원에서 삶과 그것의 질로, 그러니 ‘정의’와 ‘복지’를 빼고 에너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논리는 구구절절이지만 이 여름 벌어졌던 일을 상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쪽방촌이 밀집해 있는 용산구 동자동에는 1,165 세대가 살고 있다. 이중 절반이 65세 이상 노령층인데다 대다수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다. 등록장애인도 158명에 이른다. 주거환경이 열악한데다 경제적 여유도 없어 더위와 온열 질환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기사 바로가기)
“8월 중순을 넘어서면서까지 이어지는 폭염으로 열사병과 열탈진 등의 온열질환자가 2,000명에 육박한 정도로 늘었고, 사망자도 10명을 넘었다. 게다가 폭염이 급성심정지로 인한 사망 위험도 크게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메르스 사태 때 186명의 확진환자와 3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과 비교하면 폭염으로 인한 건강피해가 훨씬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기사 바로가기)
건강과 생명으로 드러난 것만큼 더 직접 증거가 있을까. 다시 강조한다. 에너지는 자원이고 산업일 뿐 아니라, 삶의 질이자 복지, 그리고 그 조건이다. 그리하여 에너지는 권리와 정의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이로부터 전기료 누진제를 생각하면 원칙은 분명하다. 무엇이 권리인가? 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누가 얼마의 혜택을 보는가? 권리와 정의의 원칙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 원가 보상의 원칙, 산업 정책의 원리와 충돌한다. 삶에 필수적인 ‘기본’ 에너지를 비용 부담 능력과 무관하게 쓸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자원과 비용은 ‘공적’으로 조달해야 한다.
이런 원칙에 비추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산업용 전력이다. 정부는 ‘원가회수율’이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말을 동원하지만, 전후 사정과 논리는 간단하다. 정부가 계산한 것으로 쳐도, 대기업은 원가에 미치지 않는 값만 물고 있다.
“전력원가 환수율이 85.5%에 머물렀던 이 시기동안 1.1%에 해당하는 이들 대기업은 전체 원가 할인액의 22.9%인 5조원의 특혜를 받았으며, 산업용 전력 이용 기업 전체로는 49.6%인 10조 8천억 원의 요금할인을 받았다….(중략)…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제철 등 20대 대기업은 한전으로부터 원가에 미달하는 요금으로 할인을 받았으며, 그 총액이 3조 7,191억여 원에 달했다. 특히 2014년 한전의 원가손실액의 대부분(98.9%)은 20대 기업의 원가할인액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녹색당 보도자료 바로가기)
대기업용 전기 때문에 생긴 손해는 누가 메꾸었는가. 여기에는 정의와 복지의 원칙은커녕, 수익자 부담이라는 시장원리도 작동하지 않는다. 국가가 치우치게 개입하여 만들어낸 이른바 ‘교차보조’, 그리고 그것을 악용하는 전형이다. 약자가 강자를, 빈자가 부자를, 그리고 형편이 나쁜 곳에서 좋은 곳을 돕는 교차보조라면, 어떻게 그것을 정의라 할 수 있을까.
정의와 복지의 관점에서 전기료 체계를, 구체적으로는 교차보조의 원리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 수익자 부담이나 원가회수, 경쟁력이라는 원리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아울러,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 생산체계까지 고려하고 포함해야 할 것이다.
교차보조 문제가 나온 김에 국민건강보험의 과제를 덧붙여 주장한다. 국민건강보험의 원리가 교차보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경제적 부담 능력이 더 있는 사람이 덜한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그리고 주로 젊은 층이 노인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것이 이 제도가 작동하는 원리이자 법칙이다.
이쯤이면 누구나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논의를 떠올릴 것이다.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다시 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주장한다. 부담 능력에 맞추어 보험료를 내야 한다는 원칙에 이의가 없다면, 더 늦출 수 없다. 문제점을 알고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원칙도 있다면, 무슨 정치적 고려를 하느라고 손을 놓고 있는가. 마침 야당이 논의 준비를 했다니, 정부와 여당, 국회 전체가 논의를 되살려주기 바란다.
또 한 가지, 우리는 건강보험료를 엉뚱한 곳에 ‘보조’하는 것에 반대한다. 엉뚱한 지출이란 원격의료 시범사업, 제약사 임상시험에 급여 혜택을 주는 것, 지나친 약값 인상 등에 재정을 쓰는 것이다(관련자료1, 관련자료2). 영역이나 목적이 본질을 벗어났다.
누가 어떻게 낸 보험료를 그런 용도로 쓰는가. 그냥 재정 관리나 기술적 판단이 아니니 당연히 정의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보험 재정에서도, 전기료와 마찬가지로, 경제와 산업, 경쟁력 등의 논리가 동원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담은 분산하되 이익은 사유화하는 ‘시대정신’(?)이 어느 영역인들 그냥 놔둘까.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어떻게 모으고 어디에다 써야 하는지, 끊임없이 교차보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 정의의 원리가 중심이다. 우리의 주장은 간단하다. 공적 자원을 일부의 이익을 위해 쓰지 말라. 다수의, 공적 이익을 위해, 그리고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보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