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추석 연휴가 들어 있다. 고용노동부가 나서서 경제5단체에 협조공문을 보내 휴가를 늘리라고 했다니, 일주일이 넘는 연휴를 누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줄고 휴식이 늘어나는 것은 찬성,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추석 명절이 ‘지역’과 무관하지 않다면, 여러 지역의 경제적 어려움은 ‘직격탄’ 꼴이라 해야 한다. 모두가 아는 그대로, 지금 남해안 벨트는 쑥대밭이다. 먼저 조선업의 구조조정에서 시작하여 한진해운 사태, 그리고 콜레라까지 겹쳤다. 이 지역 주민이 겪는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명절을 앞두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추상이나 가능성이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조선업 붕괴의 파장이 가장 크고 파괴적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이번 추석은 전혀 명절답지 않을 것이다. 실업과 소득감소, 소비 위축, 지역 경제의 부진이 차례대로 나타나는 중이니까.
전체 응답자 중 216명(55.4%)이 실질 소득이 줄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중 44.1%는 임금이 줄었다고 답했고 25.2% 상여금 삭감, 38.8%는 기타 수당이 삭감됐다고 답했다. “시급이 20% 줄었습니다. 상여금도 20% 정도 줄었습니다. 기타 수당이 20% 줄었고 노동시간도 20%도 줄었습니다. 실질소득을 더 많이 줄어서 30% 정도 줄었습니다. (기사 바로가기)
거제시 실업급여 신청자는 지난 5월 2449명으로 1년전 5월 1596명보다 853명 늘었다….지난 5월 예금은행 수신액은 1조 6159억원으로 지난해 9월보다 4.2%(716억원)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저축은행 대출액은 650억원으로 21%(115억원) 늘었다. 신용협동기구 대출액도 3조4628억원에서 3조6705억원으로 5.99%(2077억원) 증가했다.(기사 바로가기)
이런 사정은 금방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콜레라의 충격은 조금 지나면 회복되겠지만, 조선은 다르다. 구조적 요인에다 추세적 경향인 만큼, 지역의 침체는 한동안 계속될 일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당장만 문제가 아니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디까지 심해질 수 있을까. IMF 경제위기를 거쳤다지만, 상상력은 충분치 않다. 오래 전 비슷한 구조적 위기를 겪은 영국 같은 나라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2016년 8월 13일 한국일보에 실린 조재우 논설위원의 글에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가 들어있다.
거제지역의 한 조선소에 근무하는 임원에게 최근 들은 이야기는 섬뜩하다. “이대로 가면 거제지역에서만 실직자가 수만 명에 이를 것이다. 거제는 섬이라 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러면 이들이 거제 도심으로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거리가 무서워질 것이다.” (기사 바로가기)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지역의 평균과 숫자, 사건, 전체 상황이 어떻다는 것은 두 번째 문제다. 우리는 국가처럼, 자치단체장이나 기자처럼 말할 수 없다. 먼저, 그 안에 있는 개인과 사람의 고통(예를 들어 위의 예상이라면, 도심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그 개인)이 중요하다. 공리주의적 신화에 저항할 것이니, ‘전체’와 ‘사회’ ‘국가’를 앞세운 총량과 합산에서 벗어나 각 개인의 행복, 그리고 그 분포에 민감할 것.
공리주의는 흔히 정책과 대책을 관통하는 원리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 선공후사(先公後私)나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오랜 규범과 연결된다. 물론, 그 ‘大’와 ‘公’이 무엇인가, 또는 진짜인가를 물어야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大’와 ‘公’의 원리가 말썽 없이 지금의 사회경제체제를 운용하는 중요한 장치라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사람’의 고통을 줄이려면 국가와 정부가 피해자, 약자, 지원이 필요한 사람을 직접 보호해야 한다. 정책과 실무가 아니라 원리, 즉 “자본에는 큰 정부, 시민에게는 작은 정부”라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책임을 어떻게 나누어 질 것인가의 문제.
피해와 책임을 분산함으로써 전체 안정을 지향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장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다. 지역은 파편화되고 개별화되며, 국가는 ‘중앙’ 또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뒤로 숨는다. 사회와 국가, 중앙 정부의 책임은 최대한이 ‘지원’과 ‘조정’에 머물 뿐, 이런 구조에서 책임 주체는 어디까지나 개인이나 지역이다(여기서 지역은 확대된 개인이다).
상향 또는 하향으로 진행되는 역동(다이내믹)이 더 중요하다. 이익은 상방으로 차례로 축적되지만, 책임과 피해는 하방으로 차례로 분산된다. 예를 들어, 재벌과 대기업은 망하지 않고 중앙 정부 고위관료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익의 첫 번째 원천이면서도 피해를 가정 많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비정규노동, 하청 노동자다.
7월26일 정부는 국회에 제출한 추가경정예산안 11조원 가운데 조선산업 구조조정 지원에 1조9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6월 울산시도 조선업 실직자 재취업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3조4509억원을 편성했다. 그러나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지회장은 “무엇이 문제인지 근본적인 대안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소리 소문 없이 쫓겨나고 월급이 깎이고 다치는 건 하청 노동자인데, 수조원에 달하는 돈은 매년 어디로 가는 건지 답답하다”라고 비판했다. (기사 바로가기)
피해를 극복하는 책임도 흔히 개인으로 향한다. 현장과 실효에 초점을 둔 대책일수록 지역과 개인에 가깝고, 그만큼 근원과 구조와 중앙을 숨기는 역설. 다음과 같은 ‘사업’과 ‘대책’에 (어디에 가있는지 잘 모르는 그) 예산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거제시와 고용노동부 통영지청은 21일 조선업 근로자를 위한 ‘거제고용복지+(플러스)센터’가 개소돼 실업급여 상담 등 업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센터는 조선업종의 퇴직자와 퇴직예정자의 생계 안정과 재취업을 돕는다. 실업급여 신청과 지급, 취업 알선, 직업훈련 지원, 심리안정 프로그램 운영, 복지급여 신청, 서민금융 상담도 이곳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다. 또 귀농 맞춤형 영농교육과 실직가정 자녀공부방 운영 같은 특화 사업도 진행한다. (기사 바로가기)
개인과 지역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을 하루아침에 마련하기는 어렵다. 국가 책임을 묻는 한에서는 더 그렇다. 하지만, 어떤 원칙을 택해야 하는지는 거의 5개월 전인 4월 25일 <서리풀 논평>에서 지적한 그대로다.
‘공적’ 자금은 왜 회사와 은행에만 투입되어야 하는가? 실직자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법’과 그 재정은 왜 불가능한가? 고통 ‘분담’인가 고통 ‘전담’인가? 무슨 고통을, 어떻게 나누자는 말인가?…그 어떤 정책과 조처에도 (그 알량한 통계가 아니라) 사람과 그의 살아있는 삶이 첫 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기업과 경제를 살린다고 하지 말고 사람을 살리라! 눈과 기준을 이렇게 맞추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몫이다. (논평 바로가기).
책임과 이익의 방향을 뒤집어야 한다. 책임은 상방으로, 이익은 하방으로. 그리고 숫자와 평균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물론, 이렇게 요구한다고 바로 될 일은 아니다. 다시 국가를 민주적으로 ‘회복’하는 먼 길을 가야 한다.
국가가 바로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따로 말해야 하겠다. 지금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건강과 의료를 보장하는 일.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구조로도 그렇지만, 실무로도 그래야 한다.
엄혹한 경제 사정에서도 어떤 돈을 어디가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전염병, 유아사망률, 자살률이 달라진다는 것이 미국, 아이슬란드, 그리스의 경험이 아닌가(데이비드 스터클러와 산제이 바수. <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 안세민 옮김, 까치 펴냄). 한국도 똑 같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뿐만 아니다. 더 가난해지는 것, 더 많은 빚을 지게 되는 것, 다시 일할 수도 없게 되는 것, 마침내 다음 세대로 가난과 질병이 넘어가는 것이 모두 이와 연관된다. 바로 경제와 건강의 악순환, 그리고 ‘사회적 유전’. 다시 원칙과 관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나, 이에 대해서는 왜 일언반구 말이 없는가?
추석 명절을 보내면서 같이 할 일 한 가지를 제안한다. 거제와 울산의 어려움이 언제까지 남의 일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경제적 어려움과 그 대책, 특히 국가, 지역, 개인의 이익과 책임 구조를 생각하자. 이는 곧 정치, 생각과 말의 자리가 지역 ‘현장’ 또는 ‘현실’이면 성찰의 조건으로는 금상첨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