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공약 없는 선거와 숙의(熟議)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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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3월 들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4월 총선에 쏠려 있다. 누가 출마했는지, 누가 공천을 받았는지, 야권 연대는 어떻게 되었는지가 매일 듣고 말하는 이야깃거리다. 정당과 언론이 앞장서 분위기를 만들고 부추긴다.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이런 분위기는 올해 내내 계속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만 때로 한국의 정치는 진지함 혹은 숙고(熟考, 혹은 숙의, deliberation)보다는 조롱과 개그의 대상이었다. 어이없이 무능한 정당,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정치인, 이들이 합작한 ‘불임’의 정치는 ‘정치혐오’의 유력한 근거이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정치를 넘는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정치는 인간의 핵심적 사회활동이다. 정치학자 이스턴(Easton)이 말한 대로 정치체계가 “권위를 가지고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는 체계라면, 정치는 어떤 경우라도 피하거나 무시될 수 없다. 정치는 중요하다. 이 때문에 비록 조롱거리인 현실정치도 다시 중요해진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가 일어나고 그 영향과 파급력 또한 가장 강력한, 가치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터이자 타협과 조정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실정치는 여전히 진지함과 열정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단, 조건을 걸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대의정치의 현실은 무엇으로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정치는 사회적인 ‘숙고’를 통하여 스스로를 단단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의제를 내고 성찰과 토론, 합의를 촉매하는(이를 숙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길고 지루한 과정이야말로 정치가 제 노릇을 다할 수 있는 마당이다. 언뜻 보면 터무니없는 정쟁을 일삼는 것처럼 보여도 적어도 그 일부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고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는, 숙고의 과정을 반영한다.

여기에서 과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숙고의 과정을 촉진할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거는 숙고를 매개하는 정치의 가능성과 실제 효과를 가장 잘 드러내는 틀이라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숙고를 통한 민주주의라는 시각에서는 선거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며 그 결과가 유일하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만약 보편적 복지라는 한국 사회의 의제가 숙고의 과정 속에 있다면, 선거는 이 과정을 촉진하고 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선거가 숙고의 기능을 수행하는 현실적 통로는 무엇일까? 바로 공약이다. 공약은 숙고의 출발이자 그 과정을 규율하는 틀로 작용한다. 지역에 대기업을 유치하겠다는 공약은 대기업 유치의 효과가 무엇이고 부작용은 어떤 것이며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며 합의에 이르는 단초를 제공한다. 지역이 발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이 가능한지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집단적 경험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멀리 보면, 이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투표의 결과는 숙고의 과정을 부분적으로만 반영할 뿐이다.

이제 국회의원 총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각 정당과 정파가 무슨 공약으로 다수당이 되겠다고 하는지 잘 모른다. 유력한 정당들이 발표한 공약이 있기는 한 것 같으나 기억이 희미하고 찾기도 어렵다. 얼마나 중요하고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자가 어떤 공약을 내걸었는지 그 공약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더욱 모를 일이다. 아직 후보자도 채 정해지지 않은 지역이 적지 않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국회의원 선거에 공약이 빈약한 핑계로 좋은 것이 있기는 하다. 총선은 지역 선거여서 국가 수준의 의제는 잘 형성되지 않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본래 임무는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관점에서(!) 국가적 의제를 다루는 것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국방정책에는 강원도 철원군민과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의 입장이 모두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도 그냥 반영이 아니라 당연히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이 아닌 국가적 현안을 놓고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는 중요한 정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회의 기능이며 국회의원의 정치적 역할임을 의심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약은 이 과정을 출발할 수 있게 하고 풍부하게 하며 또한 틀 지운다.

이제라도 정당과 입후보자는 유권자에게 판단과 토론을 요청하는 제대로 된 공약을 내놓아야 한다.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보편적 복지와 무상의료는 찬반을 떠나 부인할 수 없는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 선거에 나서는 주요 정당들은 이들 과제에 대해 하루 빨리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장과 구상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그것 없이 새로운 정책과 제도의 튼튼한 기초가 만들어지기는 불가능하다. 유권자가 공약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판단하지 않는 한, 선거와 정치는 값비싼 낭비에 그칠 뿐 결코 소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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