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주제가 너무 정치만 다루는 것 같지만 다음 주까지는 널리 이해해 주시길. 관심이 온통 선거에 쏠려 있는데 다른 이야기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한편으로는 한가롭다는 핀잔을 피할 요량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꼭 좁은 뜻의 정치로만 볼 수 없으니 아주 정치에 한정된 것도 아닐 터. 정치의 계절에, 정치이자 정치를 넘는, 민주주의를 새롭게 상상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건강. 이는 민주주의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기도, 한편으로 건강을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민주주의가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점차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계량적인 연구로는 2004년 Franco 등의 연구(DOI:10.1136/bmj.329.7480.1421), 그리고 2006년 Besley와 Kudamatsu의 연구(DOI:10.1257/000282806777212053)가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대표적 연구라 할 만 하다. 이런 종류의 연구가 흔히 그렇듯, 이 연구들도 이른바 생태학적 방법으로 여러 나라를 비교한 것이라 연구방법만 두고 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민주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방법을 써도 결과는 비슷하게 나오니 전혀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정도로 의례적인 결론을 맺는다.
사실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따로 있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가 왜 건강에 좋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역시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은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 정확한 ‘경로’나 메커니즘을 잘 모른다. 그러나 흔히 두세 가지 가설을 꼽는다. 첫째는 민주주의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뽑힌 사람이 통치하는 제도이므로 소수보다는 다수 서민대중의 건강에 유리한 정책을 편다는 것이다. 공중보건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그 예. 두 번째 가설은 (첫 번째와 비슷한데) 민주주의 제도는 선거를 통해 정기적으로 유권자에게 책임을 져야 하므로 유권자가 관심을 많이 가지는 즉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주로 채택한다고 설명한다. 두 가지 설명이 비슷해 보이지만,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전자는 ‘대표성(representation)’의 문제이고, 후자는 ‘책무성(책임성, accountability)’의 문제이다. 일단 두 가지 설명 모두 터무니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는지는 좀 더 연구를 해야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거시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생생한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보다는 건강이 ‘참여’의 효과라는 설명이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게 하는 핵심의 하나가 참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을 터, 참여가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건강 효과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건강의 관련성은 참여를 핵심으로 한다.
참여의 긍정적 효과는 이미 설득력이 높다. 사회 자본이니 사회적 응집성이니 하는 복잡한 개념을 빌리지 않더라도 참여가 건강에 좋은 효과를 미친다는 것은 이제 정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참여가 건강에 왜 도움이 되는지 인과관계는 또다시 설명해야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참여가 ‘건강친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참여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냥 참여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단순히 형식적인 민주주의여서도 곤란하다(사실 참여와 민주주의는 다분히 오용, 남용되는 대표적 개념이다). 마땅히 민주적인 참여가 기초가 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여야 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건강에 좋은 참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의사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 수준은 물론, 지역과 직장, 학교, 가정에서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충분히 민주적 참여라면 결과도 과정도 모두 건강에 보탬이 된다. 예를 들어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물질적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하는 것은 국가부터 가정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건강의 불평등을 줄이고 건강수준을 향상시킨다. 개발도상국에서 가족 내 민주주의와 성평등이 영아사망률을 줄인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둘째, 평등하고 호혜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사회관계가 사회심리적 건강의 기초가 된다. 흔히 사회적 신뢰와 연결망, 사회자본 같은 것이 건강에 기여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가치들은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없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들이다. 마피아식의 무조건적 의존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자율적이며 성찰하는 민주주의가 진정한 사회적 신뢰의 기초가 된다.
셋째,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민주주의가 건강에 기여한다. 지역과 직장, 학교 가릴 것 없이 같이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으로 활동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 (이런 실천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삶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지역사회 단체나 활동에 많이 참여할수록 건강에 이롭다는 연구결과들은 실천하는 민주주의가 건강에 미치는 힘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확대, 심화하는 것은 중요한 공공보건정책이다. 사회구성원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효과로 볼 때 예방접종이나 환경보건과 다를 바 없다. 물론 건강 효과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와 참여의 가치는 중요하다. 그런데 건강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데야.
이런 민주주의는 단순히 투표와 선거라는 형식과 제도를 뛰어넘는 사회적 가치이자 실천이다. 더 깊고 더 많은 민주주의가 지역, 가정, 직장, 학교 곳곳에서 널리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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