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연구통通] 이주민 건강 피해, ‘그들’ 아닌 ‘우리’의 문제
이주연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이어 이번 달에는 민간 부문 비정규직 대책도 발표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들이 적지 않다. 특히 이주노동자 문제가 그렇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권유린, 차별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일례로 국제앰네스티 보도자료를 보자: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유린 끝내야), 이 글에서 다시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과 인권유린의 피해는 이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들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속한 민족 혹은 지역 공동체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지난 달 <국제역학회지 International Journal of Epidemiology>에 발표된 미국 미시간 보건대학원 연구팀의 논문이 바로 이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미국 아이오와 주 포스트빌 시에서 발생한 미등록 이주민 기습단속이 대개 라틴계인 이주여성들의 출산 결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논문 바로가기: Change in birth outcomes among infants born to Latina mothers after a major immigration raid).
이 연구는 2008년 5월 12일, 미국 이민세관 단속국이 포스트빌에 위치한 육류 가공처리 공장을 기습 단속하여 미등록 이주민 389명을 체포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체포된 이들 중 98%가 라틴계 이주민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유죄로 인정되어 범죄 기록이 없는 297명은 5개월의 징역형을 산 후에 강제 추방되었다. 무장 요원 900명과 UH-60A 기동헬기까지 동원했던 이 기습단속은 미국에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현장 단속이었다.
연구진은 이러한 단속이 체포 당사자는 물론, 라틴계 공동체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하나의 ‘자연 실험’ 상황으로 간주했다. 포스트빌에 거주하는 여성들을 라틴계 이주민, 라틴계이지만 미국 태생, 비-라틴계 백인의 세 집단으로 구분하고, 이 사건 발생 전후의 저체중아 출산 여부를 비교했다.
분석 결과, 이주민이든 미국 태생이든 라틴계 여성들의 경우에 포스트빌 기습단속 직후 저체중아 출산과 임신 32~36주 조기분만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 1). 기습단속과 저체중아 출산의 상관성은 기습단속 사건 발생이 임신 초기 3개월에 해당했던 여성들, 학력 수준이 낮은 여성들에게서 뚜렷했다. 반면 비-라틴계 백인 여성의 경우 사건 이후에도 저체중아 출산률이 약간 감소했다. 이는 2006년 이후 전국적으로 저체중아 출산률이 감소하고 있던 추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림 1. 포스트빌 기습단속 전과 후의 저체중아 출산률 비교
연구진은 포스트빌 기습 단속을 중요한 ‘인구집단 스트레스’로 정의하고, 이 사건이 임신 중인 라틴계 여성에게 심리사회적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저체중아 출산 위험을 증가시켰다고 설명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기습단속이 한 개 사업장만을 표적으로 했지만 그 효과는 라틴계 지역사회 전체에 미쳤다는 것이다. 심지어 라틴계 이주민뿐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난 라틴계 여성들에서도 부정적 영향이 관찰되었다. 실제로 포스트빌 기습단속 이후 이주민들은 추가 단속에 대비하여 공공장소를 기피하고 소비를 줄였을 뿐 아니라, 고용관행의 변화에 따라 소득불안정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라틴계 주민들은 ‘라틴계 = 미등록 신분’으로 동일시하는 담론 때문에 인종적 배제를 경험한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 이후, 뉴욕과는 멀리 떨어진 캘리포니아 아랍계 여성의 저체중아 출산률이 증가했음을 보고한 선행 연구를 언급하면서 (☞관련 논문: Birth outcomes for Arabic-named women in California before and after September 11),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동일 민족집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미국사회는 트럼프 정부가 추진 중인 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 폐지를 둘러싸고 큰 논란 중이다. 미국 거주 한인 청년들 1만여 명도 추방 위기에 놓였다는 점에서 국내 언론에서도 이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 관련기사: 미, 불법체류 청년 80만 명 추방 결정, 한인 1만명도 쫓겨날 위기). 어쩌면 오늘 소개한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국내 언론들은 이러한 조치가 가혹하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한국 내 상황을 돌아보면 이런 말을 하기 부끄러울 지경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강제 단속은 무차별 폭력과 무리한 벌금 징수로 여러 차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2007년부터 작년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단속 과정에서 총 9명이 사망했고 12명이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관련 기사: 출입국사무소 무리한 단속에 죽고 다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지난 6월에도 수원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한 건설 현장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져 큰 논란이 되었다 (☞관련 기사: 경기이주공대위, 이주노동자 폭력연행 출입국관리소 처벌 촉구). 또한 이러한 단속은 합리적인 사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때그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임의로 시행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관련 기사: G20전 이주민 무차별 단속 ‘밤길이 무섭다’).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를 고용관계와 근로환경 개선을 통해 해결하기 보다는 강제 단속이라는 비인권적 미봉책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90년 UN이 채택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에 아직 서명도 비준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현재 한국 사회의 이주민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국내 거주 외국인의 숫자는 이미 2백만 명을 돌파했으며,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외국인 주민 수가 3만 명 이상인 시/군/구도 7개가 넘는다. 경기도 안산시에는 7만 여명의 이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제조업, 농업, 서비스업 현장에서, 학교, 극장, 대중교통, 슈퍼마켓에서, 외국인, 이주민과 마주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외국인, 이주민이 없었던 한국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사회는 일찍이 존재한 적도 없었다. 이제는 이주민들이 경험하는 열악한 근로환경, 차별, 폭력적 단속을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 ‘인구집단 스트레스’ 문제로 여겨야 할 시점이다.
< 서지정보 > :
Novak, N. L., Geronimus, A. T., & Martinez-Cardoso, A. M. (2017). Change in birth outcomes among infants born to Latina mothers after a major immigration raid. International journal of epidemiology, dyw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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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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