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발표한 지 한 달이 좀 더 지났다. 당시 우리는 방향에 동의하면서 몇 가지 당부를 보탰다(논평 바로가기). 그 사이 여러 당사자가 의견과 주장을 내놨고 정부 구상도 좀 더 진전된 모습을 드러냈다. ‘오리무중’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책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칠 집단이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을 가다듬을수록 의견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자칫 이견 정도가 아니라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진료비는 얼마나 더 나갈 것이고 보험 재정이 얼마나 더 들지 따지면, 이견은 곧 자원 배분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으로 비화한다. 돈, 수입, 경제, 부담 무엇이라 부르든 경제적 가치를 나누는 문제는 이 정책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정도면 어떻게 결론이 나는가 하는 것보다 평화롭고 원만한 과정과 진행, 그 운영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사실 ‘과정’과 ‘결과’를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어디에서 타협하고 무엇을 양보할지에 따라 정책 결과(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정이 곧 결과를 결정한다.
내용과 무관하게, 즉 어떤 비급여가 급여가 되든 말든, 시민 부담이 늘든 줄어들든, 오로지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시민의 요구를 더 잘 충족하기 위해서도 본래 취지와 가치, 목표를 훼손하지 않도록 정책을 만들고 결정해 나가는 과정을 잘 설계하고 운영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는 둘이 아니다.
비슷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니, 최근에도 사드 배치 과정과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처리 과정이라는 반면교사가 있다. 내용이 좋고 나쁨을 떠나 의사결정 과정은 ‘현실’이다. 좋은 의도와 목표를 내세워도 결정 과정을 제대로 만들고 운영하지 못하면 결과는 무용하거나 비틀어진다.
앞서 언급한 8월 14일의 <논평>에서 몇몇 걱정거리를 제기했지만, 오늘은 좀 다른 측면에서 다시 강조한다. 우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이 집중해야 할 과정이 크게 두 가지라 판단한다. 첫째,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하고 타협할 것인가? 둘째, 건강보험 보장성과 관련된 다른 정책들을 어떻게 함께 바꾸어 나갈 것인가?
두 번째 질문은 따로 다룰 기회가 (여러 차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은 첫째 질문에 집중하고자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 건강보험 보장성을 둘러싼 이견을 개인과 윤리로 치환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기주의, ‘돈 욕심’, 의료 윤리 등은 여기에 해당하는 기준이나 논리가 아니다. 안타깝지만,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1.
이해관계 측면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가장 걱정하는 집단은 단연 의료 제공자다. 누구나 아는 일이라 무슨 비밀이라 할 것도 없다. 그동안 의원과 병원을 비롯한 의료기관의 수입 중 ‘비급여’에서 오는 것이 적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정책으로 비급여를 줄이면 의료기관이 수익을 낼 여지는 그만큼 줄어든다. 그들은 경제적 손해요 ‘박탈’로 해석한다.
의료기관이 걱정하는 것은 또 있다. 아니 이쪽이 더 클지도 모른다. 건강보험 재정 지출을 크게 늘리지 않고 보장성을 높이겠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이니, 결국 의료 제공자를 옥죄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수가(진료비) 수준, 심사와 평가, 감독, 그 무엇이든 의사와 의료기관을 전방위로 압박할 것으로 예상한다.
수입은 줄로 압박은 강해진다고 예상하면 어떤 집단인들 이를 쉽게 받아들일까. 정부가 약속도 하고 일부 오해를 해명하면서 ‘달래고’ 있지만, 불만은 언제든 터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 구체적인 결정이 있을 때마다 살얼음판을 걸어야 할 것이다.
2.
시민(이들은 보험 가입자이자 수혜자다)의 이해관계는 단연 보장성 수준과 보험료 부담이다. 정부가 비급여 대부분을 급여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현장에서는 실망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급여도 급여지만, 보험료가 오를까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부분 비급여를 급여로 바꾸는 정책은, 한 마디로 어렵고 복잡하다. 전문가가 아니면 오해하기도 쉽다. 비급여에는 ① 마땅히 급여가 되어야 하는데 다른 사정으로 비급여인 것, ② 어떤 기준으로도 급여에 포함할 수 없는 것, ③ 그 경계부에 있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 뒤섞여 있다. ‘전면 급여화’를 한다 해도 ②는 그대로 비급여로 남아 있을 것이며, ③의 일부도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계획은 ①과 ③의 일부에 대해 ‘가격’을 통제하면서 환자 부담을 조금씩 줄이겠다는 것. 환자들의 기대는 부담이 확 줄어드는 것이겠으나, 그런 기대가 실현될 가능성은 적다. 불만이 터질 것은 불문가지. 가격이 낮아졌다 하더라도 당분간 본인 부담이 어떤 것은 100% 어떤 것은 80%라면, 만족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비급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 ②, ③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이른바 ‘풍선효과’다. 결과적으로 비급여가 크게 줄지 않거나 환자가 느끼는 부담이 달라지지 않으면, 시민과 환자의 불만은 그대로 남는다. 수치로서의 보장성 수준을 달성해도 시민은 ‘실패’ 여부를 감각으로 느낀다.
보험료 부담이 늘어나는 걱정은 더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시민이 역사적으로 학습한 수준으로 볼 때, 보험료를 추가로 인상하지 않는다는 정부 약속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많이들 미심쩍어하고 한편 걱정하며, 일부는 감수하겠다고 각오하는 모양이다. 경제가 쉬 나아지지 않으면 불만과 저항이 증폭될 것이다.
정부의 이해관계는 이 정책이 얼마나 또 어떻게 성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직접 발표했고 부처의 정치적, 정책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모양새니, 이 정책은 정권 차원에서 정치적 자원이자 정치적 부담이다. 다른 보건이나 의료정책은 옆으로 밀려났고, 이 정책이 정권 전체의 대표선수가 되었다. 자칫 다른 정책의 원칙을 훼손해야 할지도 모른다.
경제 부처, 특히 예산 당국은 걱정이 클 것이다. 추가 재정 부담이 없을 것이라 약속했지만, ‘플랜 B’를 준비하리라 본다. 보험료 인상도 인상이지만 국고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일 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을 것이 뻔하다. 주어진 틀 안에서나마 어떻게든 재정 지출을 줄이려, 때로는 무리한 일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정책으로는 그럴싸한 대안을 준비하고 괜찮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만만치 않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공허한 수치(예를 들어 보장성 수준 OO% 달성)만 남고 내용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용이란 환자와 시민이 겪는 고통과 안녕의 정도를 뜻한다.
정치와 시스템을 다시 강조한다. 건강보험 보장성 안에서도 이견, 갈등, 투쟁이 끊이지 않겠지만, 건강보험의 정치는 또한 닫힌 시스템 안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보장성과 건보 재정이 나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차의료와 의료전달체계, 공공의료와 민간의료의 역할 분담, 지역사회 보건, 장기요양과 같은 문제를 같이 풀어야 한다.
이해관계의 충돌, 그리하여 상호관계의 교착 상태가 초래되는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 건강보험과 보건의료체계 전체, 나아가 사회정책은 또 다른 상위 시스템 속에서 맞물려 돌아간다. 힘과 힘이 부닥칠 때, 그리고 그 균형이 팽팽할 때, 정책은 나아가지 못하고 갈등은 지속하는 법. 여러 영역에 걸쳐 같이 풀어야 한다.
주의할 것 한 가지, 겉모양만 봐서는 그 균형을 잘 알 수 없다. 사실상 거의 완전히 시장이 된 의료에 뿌리박고 움직이는 한국의 건강보험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료 시장’까지 같이 봐야 한다. 국가-시장(경제)-시민(사회)의 3분법!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치하고 힘의 균형이 비교적 팽팽하다는 점에서 한 가지 새로운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름은 뭐라 해도 좋다. 민(民)-의(醫)-정(政) 사이의 협의, 그리고 그것의 제도화.
코포라티즘적 타협 과정은 도덕이 아니라 전적으로 힘의 관계라는 점에서, 과거 우리는 이런 접근에 부정적이었다. 양보를 압박한 힘이 없고 타협할 필요가 없는데 ‘사회적 대타협’이 가당키나 한가(예를 들어 노사정위원회).
우리는 지금 민-의-정 사이의 관계가 조금 다르다고 판단한다. 새로운 보건의료 정책과 체계, 재정 부담, 정치적 성과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아슬아슬하다. 바뀐 정치적 환경 속에서 민-의-정 모두 어떤 힘을 가졌으되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희생’ 없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의료 제공자, 시민과 환자, 정부 모두 자신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주고받을’ 것과 그것의 물리적 기반이 있어야 코포라티즘적 결정이 가능한 법, 우리는 지금 맥락에서 그런 구조를 만들고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한 가지 대안적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