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논평] 의료 ‘공장’이 ‘생산’하는 방법
병원은 공장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 허준, 슈바이처, 나이팅게일 모델이 익숙하니, 병원을 공장이라 부르면 생소함과 어색함을 넘어 거부감부터 들지 모른다. 공장을 거부하는 정서는 그리 단순하지 않지만, 현대의 병원을 공장으로 부르지 않으면 무엇을 공장이라 할 것인가?
건물이 크고 많은 직원이 근무하는, 겉모양만 회사나 공장을 닮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영석이 쓴 <공장의 역사>라는 책에는 1835년 유어(Ure)라는 영국 사람이 공장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적혀 있다(185~6쪽).
“공장이라는 말은…한 중심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추진되는 하나의 생산적 기계체제를 근면한 숙련으로 다루는, 갖가지 성인 및 연소 노동자들의 결합작업을 가리킨다…(중략)…동일한 대상을 생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협조하며 작용하는 다양한 기계적·지적 기관으로 구성된, 그리하여 그 기관들 모두가 자율적으로 운동하는 동력에 종속되어 있는, 거대한 자동장치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정의가 옳고 그른 것은 오늘 논평의 주제가 아니며, 지금 공장도 그런가 하는 것도 관심사를 벗어난다. 그보다는 한국의 병원, 특히 대규모 병원이 우리에게 익숙한 ‘공장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병원의 겉모양이나 구조가 그렇다기보다는 그 운영 원리와 경영 방식이 치료 서비스를 생산하는 공장에 가깝다는 뜻이다. 사실 현대적 병원의 작동과 운영 원리는 상당 부분 공장(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중에서도 미국 공장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20세기 전반부 미국에서는 포드 자동차 공장을 모범으로 한 효율성 운동이 크게 유행했고, 병원 경영도 이런 시대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공장식 병원’의 효시는 미국 미시간 대학 부속병원이다. 이 대학은 1917년부터 1925년까지 대학병원을 새로 지었는데, 병원 설계를 맡은 사람이 앨버트 칸이라는 건축가. 바로 옆 동네에 있는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계한 사람이 병원도 설계했다(논문 바로가기).
스스로 고백했듯이,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으로 대표되는 공장의 운영 원리가 병원 설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앞서 인용한 글에는 칸이 1932년 미국병원협회에서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
“병원을 건축하려면 생산과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제조업 공장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원리가 병원 건물을 계획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된다….모든 부서가 공동 작업을 통해 최대의 효율과 최고의 성과를 내도록 협력해야 한다.”
미시간 대학이 왜 이 건축가에게 새 병원의 설계를 맡겼는지, 그렇게 지어진 병원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더 중요하다. 미시간 대학병원은 한 가지 대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병원의 공장화는 ‘시대정신’이었고 ‘운동’이었다.
어떤 분위기였을까. 같은 글에 1924년 캐나다 몬트리올 종합병원의 원장이 미시간 대학 이사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인용되어 있다. “근대적 병원 경영은 공장을 운영하는 것과 꼭 같은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생산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병원이 다 지어진 후인 1932년 칸이 미국병원협회에 초청받아 자신이 설계한 병원을 설명했다는 것도 무엇이 ‘주류’가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럼 한국의 병원은? 현대적 병원은 구조와 기능, 운영 원리 모두 미국 병원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 병원 건축의 도화선이 된 서울대학교병원 건물을 미국 회사가 설계한 것은 유명하다(병원 홈페이지에는 1966년 미국 설계전문가 화이팅이 내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과거사가 된 것이 아니라, 비슷한 관계를 지금도 찾을 수 있다(기사 바로가기i).
“병원 설계를 맡은 미국의 엘러비 베켓(Ellerbe Becket)사는 새 세브란스병원·하버드대학병원·메이요클리닉 등을 설계한 병원전문 설계회사. 엘러비 베켓사는 용인동백세브란스병원을 미국 친환경 인증 평가인 ‘리드(LEED)’ 골드 인증을 목표로 설계했다.”
건축과 건물이 두드러지지만, ‘침투’와 영향은 하드웨어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사람과 지식을 비롯한 많은 채널과 경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힘을 모두 살피기는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동안 한국 의료는 착실하게 ‘미국화’ 과정을 밟아왔다는 것.
결국. 한국의 큰 병원은 산업의 초석이 되는 공장, 그것도 새로운 원리인 신자유주의까지 장착한 현대적 공장에 이르렀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생산성과 효율성, 초과 이윤을 금과옥조로 삼는 거대한 공장.
공장인 된 병원을 길게 설명했지만, 사실 우리는 병원을 넘어 ‘생산체제’ 전반에 주목한다. 공장은 생산체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념형’일 뿐, 보건의료를 생산하는 체제는 공장뿐 아니라 ‘마치코바’(동네 작업장)와 1인 사업자까지 포함한다. 의원, 보건소, 방문보건시설과 방문보건요원이 모두 생산체제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생산체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생산체제가 생산물(보건의료 서비스)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근 문제가 된 병원에서의 ‘태움’ 문화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인권, 삶과 노동의 의미 등), 생산물인 보건의료 서비스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인권을 침해당한 간호사가, 장시간 근무로 잠도 제대로 못 잔 전공의가 무슨 수로 좋은 진료와 돌봄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산과 소비의 직결성이 중요하다. 의료를 비롯한 휴먼 서비스가 제조업 공장과 다른 점은 생산과 소비(의료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이렇게 쓰자)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시간적 지연과 공간적 이동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행위자인 개인을 비롯한 생산체제의 특성은 산출물에 즉각 그리고 직접 영향을 미친다.
의료에서는 그 산출물이 바로 치료, 돌봄, 정서적 교류와 공감, 대화와 상호작용 같은 것들이다. 오늘 환자와 시민이 한국의 보건의료와 서비스에 무슨 문제와 불만을 느낀다면, 생산체제가 어떤지를 돌아봐야 한다. 인성과 도덕성, 윤리도 중요하지만, 생산체제에서 비롯된 문제와 비교하면 개인 요인은 훨씬 적고 작다.
생산체제에 주목하는 진정한 이유. 지금 한국 보건의료의 생산체제는 일대 위기를 맞은 것처럼 보인다. 이유가 무엇이든 “효율적인 대량 생산”이 산출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라면, 이것이 가능한 투입과 과정, 운영은 전근대와 과거의 틀을 벗지 못한 상태다. 대표적인 것이 대량 생산을 뒷받침하는 장시간 노동.
공장으로서의 병원이라는 은유가 타당하다면, 이제 이 공장은 어떻게 될까?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 서울아산병원 신규 간호사 고(故) 박선욱 씨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돌아가신 이의 명복을 빌면서, 우리는 이 일을 한국 보건의료의 생산체제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태움’이라고 불리는 병원 문화가 그가 목숨을 잃은 직접 원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보건의료직 종사자의 삶과 노동이 온갖 위험과 고통에 무방비 상태라는 것은 틀림없다. 오늘 우리의 용어를 쓰자면, 한국 보건의료의 생산체제는 노동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할 것이다. 건물, 기계, 자본, 심지어는 돈의 위기도 아닌, 바로 노동의 위기.
역사적으로 국가와 사회가 공장에 개입한 중요한 계기가 영국의 ‘공장법’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 공장법의 핵심이 바로 연소자 노동 금지와 노동시간 단축이 아닌가? 지금 병원이 그 공장과 질적 차이가 없다면, 노동자와 노동의 고통이 지속한다면, 그리하여 생산체제를 지속할 수 없으면, 국가와 사회가 새롭게 개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