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평화체제 만들기에 ‘구경꾼’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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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논평] 평화체제 만들기에 ‘구경꾼’이 될 것인가

 

 

‘극장국가’ 개념은 때로 쓰임새가 있다. 예를 들어 북한 정치의 과거와 오늘을 이해하는 한 가지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권헌익·정병호 지음. <극장국가 북한>, 창비 펴냄) “영원한 권위를 성취하겠다는 각오로 인위적이고 과장된 대중동원의 예술정치로 무장한 극장국가”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그 극장국가 개념의 출발은 문화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다. 그는 19세기 인도네시아 발리의 정치체제를 분석하고 극장국가를 이렇게 설명했다(<극장국가 느가라>, 김용진 옮김, 눌민 펴냄).

 

“느가라를 이해하는 일은 권력의 역학이 아닌 권력의 시학을 정교화하는 일이다….(중략)…여러 정치 행위자들이 함께 상연했던 연극, 그 와중에 그들이 배치했던 무대장치, 그리고 그런 상연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더 큰 목적 모두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 상상력 있는 에너지, 불평등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호학적 능력으로부터 국가가 힘을 도출했으며, 그 힘은 충분히 실재적이었다.”

 

북한이나 느가라(발리의 정치체제)를 극장국가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정확한지는 우리의 관심 범위를 넘는다. 아마도 그 유용성은 국가와 정치체제, 그리고 그를 움직이는 동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연관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두자.

 

 

오늘 우리가 극장국가를 동원하는 문제의식은 국가와 통치, 그 행위자 관점이 아니라 ‘피치자’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극장국가를 구성하는, 그러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또 하나의 행위자, 피치자로서의 그들(=우리)은 누구인가? 그들은 행위자인가 구경꾼인가, 또는 둘 다인가?

 

북한이나 극장국가 느가라에서 ‘배우’와 ‘관객’은 때로 분리되고 때로 합해진다. 궁전에서 벌어지는 국가의례나 아리랑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배우인 동시에 관객이다. 서로에게 배우이면서 관객이라 해도 좋다. 물론, 통치하는 극장국가는 이를 의도하고 연출한다.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바로 그 극장은 다르다. 현대적 극장국가는 배우와 관객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극장국가에서 우리(피치자)는 완전한 관객이며, 객석을 떠나 배우 노릇을 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역할을 바꿀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실천의 형식 때문이다. 새로운 극장에서(예를 들면 영화나 텔레비전이라면) 배우와 관객은 매체를 통해 만날 뿐 직접 만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며, 그 간격을 매체가 연결한다.

 

형식은 반드시 내용을 구속하는 법.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한, 관객으로서 우리가 소비하는 것이 실재인지, 그 실재를 복제한 것인지, 실재를 비추는 거울인지, 실재와 느슨하게 연결된 추상적 개념인지, 아예 상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미디어로만 만나는 극장 무대의 정치인에 대해 우리는 그의 무엇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인가?

 

극장국가를 동원한 직접 계기는 얼마 동안 숨 가쁘게 몰아친 남북 대화와 북미관계를 둘러싼 정세 변화다. 국제 정치가 본래 개인의 현실과 멀찍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소지가 있지만, 최근 벌어진 상황은 극장의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한국의 범위를 한참 넘었으니 극장국가라기보다는 극장이 된 국제, 그리고 국제 정치.

 

오늘날 극장이 된 것은 그냥 한 가지 사소한 외부 사건이나 사례가 아니다. 남북 대화와 북미관계, 동북아 정세가 내 삶과 일상생활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매일 우리를 지배하고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어떤가에 따라 나라와 지역 경제가 달라지고 직장과 일자리가 바뀐다. 그에 따르는 마음과 분위기와 스트레스는 또 어떤가?

 

이 중요한 현실,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의 격변을 우리는 텔레비전, 유튜브,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관람’한다. 정치는 오로지 보고 즐기며 한탄할 시청 대상이다. 가장 적극적 행위라 해봐야 10점 만점에 몇 점과 별 몇 개로 표현되는 시청자 평가, 아니면 ‘좋아요’와 ‘마음에 들어요’를 클릭하는 정도에 멈춘다.

 

긴박하고 절실한 국제 정치는 순간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한편의 ‘극(劇)’으로 바뀐다. 주연과 조연, 악역, 우여곡절, 극적 반전, 결말 같은 말이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대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방문과 경기 관람, 회담과 같은 드라마적 요소가 실재를 대체하거나 상징하는 것도 마찬가지. 배우의 정치인지, 정치의 배우인지, 혼란스럽다.

 

피치자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관객일 뿐 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할 수 없으니, 우리는 정치적으로 소외될 뿐 아니라 ‘자기 결정권’이라는 귀한 가치로부터도 배제된다.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자아실현은 멀어지고, 민주공화국 인민으로서의 효능감은 더 떨어진다.

그저 두 손 놓고 경과를 봐야 하는 구경꾼, 그 2% 부족함만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결정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도 관객과 소비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미디어 저 건너편에 있는 ‘유사 현실’에 힘을 미치기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했지만,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 뒤집는다고 내일 트위터로 전하면? 우리의 운명을 어디에 맡겨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극장 밖으로 나오자고 제안하고 싶다. 텔레비전과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과제로. 예를 들어, 관련 기관과 관련자는 당장 인도주의적 남북 교류 논의를 다시 시작하자. 개성공단 문제, 이산가족 만남, 스포츠와 문화 교류, 관광도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보건과 의료는 극장을 나와 현실로 들어가는 영역으로 적격이다. 많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어린이 영양, 예방접종, 의약품 등이 저절로 떠오른다. 전문가의 학술 교류도 괜찮다. 과거 경험이 있으니 실무적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어떤 방식의 통일이 바람직한지, 한미동맹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중국과 일본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 ‘먼’ 이야기에서 출발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관객이 될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첫 번째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튼튼하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 내부의 압력을 키우는 것도 한 가지 길이 아닌가 한다.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열정을 발견하고 만들며 키우는 일, 그 힘이 종국에는 무대 저편, 미디어 건너편에 가 닿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벼락같이 주어진’ 선물이 아님을 잘 안다. 이제 조금 열린 그 틈새가 오랜 기간 극장 안과 밖에서 말과 경험, 압력을 쌓아 온 결과라면, 그 문을 더 활짝 열어젖힐 방도도 따로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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