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논평] 6월 지방선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6월 13일 지방선거까지 딱 한 달 남았다. 곳곳에 출마자의 얼굴과 홍보물이 보이지만, 딱히 선거철이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늘 그렇듯 지방자치와 지방정치의 허약함을 반영하는 것 같아 왠지 마음이 짠하다. 올해는 남북과 북미대화라는 태풍이 부는 바람에 지방과 지방선거가 더 작아진 느낌이다. 그냥 이대로 또 한 달을 보내고 선거를 치러도 괜찮을까?
평화와 지방선거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걸린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군사적 긴장이나 갈등, 전통적 안보 개념을 훌쩍 뛰어넘는다. 진작부터 ‘인간안보’(또는 인간보장)이라는 말이 있었거니와, 이는 식량, 보건, 환경은 물론이고 공동체와 정치까지 포함한다. 이런 평화체제는 또한 한반도 모든 지역의 균형 발전과 연결되어 있으니, 이 때문이라도 지방선거를 과제로 올려야 하겠다.
먼저 말부터 바로잡자. 지금 지방정부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지방자치와 분권의 기초가 되는 ‘지방자치법’부터 지방정부를 ‘지방자치단체’라 부른다. 도와 광역시, 시, 군 정부를 단체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한가? 일부러 격을 낮춘 느낌, 국가와 정부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무슨 자발적 조직이나 임의단체 같은 인상을 주지 않는가?
하여 이 논평부터 ‘단체’라는 말을 버리고 ‘지방정부’를 택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거나 낙관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방과 지역 곳곳이 빠르게 위축되는 이른바 ‘지방소멸’이 현실이니, 다만 지금부터라도 정부로서의 위상과 격이 달라지기를 희망한다.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첫째 문제가 인구다. 3, 4만 명에도 이르지 못하는 인구로는 무엇을 한들 경제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 재정자립도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고, 직장과 일자리 때문에, 또는 학교와 병원 때문에 사람이 떠나고 인구는 더 줄어든다. 축소의 악순환이다.
현상은 인구로 나타나지만, 이는 정치, 경제, 사회 기반이 무너진 것을 반영한다. 학교도 영화관도, 제대로 된 의원과 병원도, 줄어들고 없어지는 판이다. 시장조차 붕괴하는 상황이면, 귀농·귀촌이나 주민등록지 옮기기, 은퇴자 유치하기 같은 몸부림으로는 본질을 바꾸는 데 한계가 있다. 한껏 나가도 미봉책을 벗어나기 어려울 터.
기반 중에서도 정치부터 묻는 것이 제 순서다. 경제와 사회 기반이 모두 정치에서 시작한다 할 때, 모든 것의 기반이 될 “정치가 지방소멸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가?”가 핵심 질문이 되어야 한다. 앞뒤 순서를 가리기 어렵지만, 정치와 사회가 지지부진일 때 정치가 돌파구가 되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다.
희망찬 답이 아쉽지만 누구에게 들어도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다. 중앙과 지방 정치 모두 그럴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위기에 맞선 당사자 모두가 관성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다.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긴 하다. 지방자치가 지역 토호를 살찌우고 부패 구조를 강화했다는 평가는 새삼스럽지 않으니, 축적한 것이 거의 없는 정치적 파산상태다. 그 구조 위에, 지금 소멸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도 토건과 축제, 기관과 공장을 유치하겠다는 ‘발전국가’ 모델에 머물러 있다.
중앙 정치, 전국 정치는 좀 나은가? 오래된 고질과 병폐(예를 들어 특정 정당의 지역 독점)와 맞물려 지방이 맞은 위기를 해소하는 데 역부족이다.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 예를 들어 다음 선거에 도움이 되는 예산 따기 같은 것을 빼고는 대부분 ‘립 서비스’를 벗어나지 못한다.
중앙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백약이 무효’라는 패배감과 회의, 냉소주의도 널리 퍼져 있다. 이대로 가면, 다시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되면, 다음은 지방이 말썽 없이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단계가 되지 않을까?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지방 안락사’의 정치가 작동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제도와 삶을 구분하자. 지방정부 수가 줄거나 시군구를 통합해야 하는 상황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어떤 지역의 인구가 감소하거나 노인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국회의원, 군수, 시장 자리가 없어지거나 공무원이 줄어드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그곳에서 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삶, 그 삶의 안녕과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정치, 새로운 정치다. 중앙과 지방 정치가 마찬가지다. 지방과 지역의 지리적 구획과 이름, 지역구 국회의원 정원, 지방정부의 장과 의원 선출에만 목을 매는 ‘상징 정치’를 벗어나 ‘삶의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삶의 정치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는 이 <논평>이 올해 2월 주장한 것 그대로다(글 바로가기).
“사람, 지금 그곳에 사는 주민의 질 높은 삶에 초점을 두면 ‘지방 살리기’가 아니라 ‘사람 살리기’가 된다. 우리 시·군·구는 없어질 수도 있지만, 주민 모두가 예외 없이 행복하고 높은 삶의 질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것.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방향에 동의하더라도 더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의 문제다. 도지사, 시장, 군수, 의원, 그리고 공무원이 어떻게 이 길로 나가도록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딱 한 가지, 현실 정치의 이해 당사자가 아닌 주인, 시민, 군민, 주민, 유권자가 스스로 정치를 조직하고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대의 정치의 대표성을 회복하는 길만이 남았다.
다행하게도 대표성의 싹은 제도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으니, 주민의 절박한 요구는 어떤 형식이든 제도를 움직이기 마련이다. 한 가지 예로, 충청북도의 한 도의원 후보가 최근 내놓은 공약은 다음과 같다(링크와 인용은 생략한다).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의료기관 설립 및 의료법인을 유치해 24시간 응급의료체계를 마련하겠다”…”OOO군립의료원 신축부터 기존 OOOO병원 부지에 민간의료재단 유치, 대학병원의 분원 유치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겠다”…”어르신들이 편안하게 생활하며 청·장년은 걱정없이 일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마음놓고 공부하고 뛰어놀수 있는 OO을 만들겠다”…”국가발전의 근간이 됐던…폐광산의 친환경적 복원을 추진하겠다.“
주민들부터 비롯된 요구를 제대로 반영했다 하더라도, 현실 정치가 마련하고 추진하겠다는 다짐은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의 본령은 그 요구를 날 것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정책과 현실 정치를 엮어 가능한 것으로 ‘프레이밍’하는 것이 아닌가.
언뜻 봐도 민간병원을 유치하고 대학병원 분원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몹시 어렵다. 과거 스타일로 말하면, 솔깃하지만 공약(空約)이 되기 쉬운, 선거에 쓰기 위한 소외된 약속이 되기 쉽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현실 정치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보완이자 대안으로, 시민 정치를 회복하자. 주민의 요구를 가능한 대안으로 만들고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요체면, 시민은 관심을 가지고 알며 실천하는 정치적 주체여야 한다. 좋은 사례, 배울 만한 교훈은 한둘이 아니니, 공공병원 만들기 운동을 했거나 하려는 성남, 대전, 서부 경남 등이 이에 속한다(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지금 각 지역에서 관심이 커지는 건강 불평등 문제도 정치적 의미가 가볍지 않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지방선거가 둘이 아님을 거듭 주장한다. 지방선거를 통해 소멸 위기에 있는 지방이 살아날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남북의 긴장완화도 미래를 보장하기 어렵다. 모두가 사람과 삶을 살리는 지방정치에 힘을 보탤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