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기술 기반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
[서리풀 연구通] ‘디지털 성폭력’ 적극 대처해야
팥수수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최근 한 미술대학에서 남성누드모델의 나체 사진이 불법 촬영되어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유되는 범죄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신속하고 집중적인 수사로 단 며칠 만에 범인이 잡혔고, 여성인 피의자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언론의 포토라인에까지 섰다.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절차의 수사였지만 많은 여성들이 분노했다. 자신들이 경험한 ‘경찰, 사법기관의 멸시와 무관심 속에서 디지털성폭력에 홀로 대응’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미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 혜화역에서는 1만 여명의 여성들이 모여 ‘동일범죄 동일수사 동일처벌’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016년 여성가족부의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몰래카메라, 스토킹 등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새로운 폭력의 피해자 역시 기존의 신체적 성폭력, 가정폭력과 마찬가지로 거의 여성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디지털 성폭력 문제는 한국만의 특수한 것은 아니다.
호주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치안과 사회>에 발표한 논문 “성인 피해자에 대한 기술 기반 성폭력 치안: 경찰과 서비스 부문의 관점”은 기술 기반 성폭력(Technology-Facilitated Sexual Violence, 이하 TFSV) 피해자의 특성, 범위, 법적 대응을 파악하기 위한 대규모 연구의 일부분으로, TFSV에 대한 경찰, 관련 서비스 종사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다루고 있다.
연구진은 그동안 호주에서 TFSV에 대한 관심이 주로 아동의 성 착취와 학대에 집중되어 있고, 성인의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연구를 진행했다. 현실에서 TFSV의 실질적 피해가 종종 축소 보고된다고 생각했던 연구진은 경찰, 법률 서비스, 가정폭력과 성폭력 서비스 부문 제공자 등 이해관계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법 집행의 문제점, 도전 과제 등을 밝히고자 했다. 면담에는 경찰(성범죄 전문, 컴퓨터 범죄 담당) 12명, 법률 분야 이해관계자 8명, 가정폭력과 성폭력 서비스 분야 이해관계자 10명 등 총 30명이 참여했다. 면담참여자 중 남성은 8명이었고 모두 경찰이었다. 면담은 2013년 9월부터 2015년 2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연구는 선행연구에서 제안한 TFSV의 5가지 특징적 행동, 즉 (1) 온라인 성적 괴롭힘, (2)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괴롭힘, (3) 사이버 스토킹, (4) 이미지 기반의 성적 착취 (‘리벤지 포르노’ 포함), (5) 피해자에게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하기 위한 통신 기술의 사용 같은 심각하고 새로운 위험에 대한 경찰의 대응에 초점을 두었다.
분석 결과, 면담에 참여한 많은 관계자들은 TFSV를 아동 온라인 “성적 착취”에 한정하고 성인들의 TFSV 문제에 대해서는 축소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이렇게 성인에 대한 디지털 형태의 학대, 폭력, 괴롭힘을 축소해서 생각하는 것은 구조적, 사회적, 정서․심리적 해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신체적 형태의 해악만을 강조하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디지털 상황에서 재현되고, 잠재적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권력과 착취 관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경찰 같은 이해관계자들에게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면담 참여자들이 한결 같이 지적한 문제 중 하나는 온라인이나 이메일, 텍스트 기반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생한 파트너 폭력, 스토킹과 괴롭힘은 피해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법을 집행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법원 절차가 온라인 괴롭힘의 심각성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는 우려를 공통적으로 드러냈다.
시급하게 개선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로 지적된 것은 이미지 기반의 성적 착취였다. 성적 이미지는 피해자를 괴롭히기 위해 쓰이며, 여성을 협박하거나 강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을 위해 위협이나 강요의 수단으로 사진이나 비디오를 활용하는 것을 ‘이미지 기반 성 착취’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연구진은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기술 발달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더 쉽게 접근하고 강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해악이 점점 더 광범위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법률과 법 집행 기관의 대응이 느리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디지털 악용과 괴롭힘의 심각한 피해를 인식하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하며, TFSV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폭력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찰에 대한 교육과 지지에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TFSV나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법률 정비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교육과 예방 노력은 물론 인터넷, 소셜 미디어 제공업체 규제 등 다양한 수준에서의 대처가 필요하다는 점 또한 강조했다.
한국은 호주 사회와 정치사회적 맥락이 다르다. 호주에서는 누구나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온라인 성적 착취조차 한국의 경찰과 사법체계에서 위중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대처 또한 매우 미흡하다. 최근 ‘동일범죄 동일처벌’ 요구와 함께 터져 나오는 경찰의 불공정한 대응과 법체계에 대한 경험담 중에는 아동청소년 시기에 디지털성폭력에 노출되었던 고백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우리가 호주의 연구결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불법촬영과 온라인 유포 같은 ‘디지털 성폭력’은 신체적 성폭력 못지않게 매우 심각한 성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한 여성을 협박하거나 강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는 ‘성적인 이미지’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이는 명백하게 ‘이미지 기반의 성적 착취’라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법률 정비뿐 아니라 경찰과 사법기관 등 관계자에 대한 교육, 여성경찰인력 보강은 물론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제공업체에 대한 규제와 처벌 등 다양한 수준에서의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년 한 해 온라인에서는 성폭력 대처에 늑장을 부리고 피해여성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경찰을 향해 “#경찰이라니 가해자인줄”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었다. 채 1년도 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동일범죄 동일처벌”이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되고 있다. 이쯤 되고 보니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여성들의 요구가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것이라고 느껴지는 건 필자만의 비관일까?
* 서지정보
Powell, A. and Henry, N., 2018. “Policing technology-facilitated sexual violence against adult victims: police and service sector perspectives”. Policing and Society, 28(3), 291-308.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