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남짓이면 추석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말마따나 벌써 분위기가 다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치긴 어렵다.
명절은 귀향을 뜻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인터넷이 대세지만 열차표를 사려고 역 앞에 긴 줄을 선 것은 올해도 마찬가지다. 물론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이런 ‘귀성’ 풍습은 1960년대 이후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데서 생겼다. 오랜 전통 같아 보이지만, 산업화와 도시화로 최근에야 만들어진 것이다.
수도권이 국토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 것은 반세기도 채 되지 않았다. 귀성객 수는 1960년대 말에는 10만 명이 넘지 않았고 1980년대 중반까지도 8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문화와 본능으로 포장되는 귀성은 결국 산업화와 도시 집중이라는 한국적 근대화의 결과물이다. 훈훈한 가족애와 따뜻한 고향이 그려지지만, 고단한 농촌과 피폐한 지방의 모습이 같이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사이 농촌의 쇠락은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다. 30년 새 농촌 인구는 70%가 줄어 현재는 농업 종사자가 300만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부분 노령 인구라, 50대 이상 비중이 60%를 넘는다.
경제적 격차도 짐작하는 그대로다. 지난 주 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작년 농가 소득이 도시근로자 가구의 59.1% 밖에 되지 않는다. 도농간의 격차가 사상 최대로 벌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농촌 내 불평등도 더 심해지고 있다.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2007년 0.402에서 2011년 0.424까지 올라갔다. 절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빈곤 농가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농촌 문제와는 다른 듯 싶지만, 비수도권의 침체 역시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 농촌이 주로 농업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지방의 위축은 전반적 경제사회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지방은 본래는 중립적 말이지만 이제 비수도권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모든 것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하기도 민망하다. 이 정부 들어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듯 아예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잊을 만하면 지역 균형발전을 말하지만, 누구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다.
지방의 쇠퇴는 통계수치를 무색하게 만드는 참담한 현실이다. 혹시 이번 명절에 수도권에서 비수도권으로 귀향하는 사람들은 유심히 살펴 볼 일이다. 내 고향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건강과 보건의료에서 볼 수 있는 지역간 불평등은 이런 국가 차원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그대로 반영한다. 모든 것이 수도권과 도시로 집중되는 현실에서 건강과 의료만 그렇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불평등의 구조는 분명하다. 농촌과 비수도권에서 질병과 죽음의 확률은 더 높은 반면에, 병원과 의사, 그리고 의료이용은 더 적다. 튜더 하트가 말하는 ‘의료의 반비례 법칙(Inverse Care Law)’이 딱 맞는 말이다.
건강의 불평등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병원과 의사가 더 많이 있어야 하는 지역일수록 병원과 의사를 보기 어려운 뒤집혀진 현실. 자본주의와 시장 법칙에 충실한 보건의료체계가 빚어내는 필연적 결과를 확인한다.
농촌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한 지난 7월 13일 한 언론의 보도를 보면, 경남 고성군에는 14개 읍면 중 9곳에 의료기관이 없다(아마도 공중보건의는 있을 것이다). 몇 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에서 전국 1,500여개 읍면 중 약국이 없는 곳이 655개라고 답변했다.
농촌에 의원과 약국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 읍면 소재지지만 아예 의원이나 약국이 없는 곳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 돈벌이가 안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다. 개인이 투자하고 경영하는 의료기관이라면 환자 수가 적은 곳에서는 버틸 수 없다. 의사 수와 약사 수를 늘린다고 저절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도로가 좋아지고 자동차가 많아져서 인근 도시로 가는데 30분이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농촌에 어떤 사람이 살고 어떤 건강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탁상공론이다. 응급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현실보다 심각한 것은 포기한 분위기가 짙다는 점이다. 농업과 농촌을 되살리는 과제는 시대착오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FTA 논의에서 보듯이 비교우위와 효율성은 농민들의 내면까지 장악한 시대정신처럼 보인다.
균형 발전도 무얼 모르는 소리로 취급받기 쉽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나라에, 국경을 넘는 글로벌 경쟁 시대에, 수도권과 지방을 구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농촌과 지방은 여전히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농촌과 지방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명백한 삶의 불평등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농촌과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건강과 의료의 필수적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든 정의에 어긋난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문명사회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사람이 적고 구매력이 떨어지는 곳에서 시장이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시장과 효율성이라는 뜬구름은 완전히 잊자. 정의와 형평성이 이런 곳의 건강 문제를 보는 틀이 되어야 한다.
덧붙일 한 가지. 농촌을 살릴 근거로 식량 안보니 새로운 부가가치니 하는 논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조차도 이익을 보고 투자를 더 하라는 시장 논리라고 생각한다. 장기와 단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 경제적 가치가 기본권으로서의 건강과 의료를 넘을 수는 없다. 경제적 채산이 맞지 않아도, 심지어 전망이 어두워도,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건강과 보건의료의 권리를 가진다.
더 늦기 전에 인력과 시설, 의료 서비스, 응급의료체계를 공공 중심으로 완전히 다시 짜야 한다. 평균적인 방식과 관행을 벗어난, 근본부터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공허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 길 말고는 방법이 없다.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요하다. 농촌과 지방이 ‘2등’ 국민, ‘내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국가의 어떤 지역도 이런 처지가 되어서는 제대로 된 국가라 할 수 없다.
현대 정의론의 기초를 놓은 정치철학자 롤즈는 자긍심을 정의 실현의 필수 요소로 여겼다. 자긍심의 사회적 토대야말로 정의로운 사회가 평등하게 배분해야 할 기본 가치(또는 기본재)의 하나라고 주장한 것이다.
농촌과 지방에 산다는 것이 왜 자긍심에 상처를 입는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면 도시로 수도권으로 가야 하는 부정의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기회만 되면 떠나고 싶은 곳에서 자긍심을 갖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크게는 발전의 의미조차 다시 정의해야 하겠지만, 우선 국토 균형발전의 목표와 전략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목적을 가지고 농촌과 비수도권을 ‘역차별’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보듯, 시장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다. 비시장적 방식 – 더 강력한 사회적 개입 – 이 필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국가와 공공을 빼고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이번 명절과 귀향의 논쟁거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