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내 탓만으로 피할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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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 많다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OECD 국가 중에 8년째 1위라고 하니, 자살률이 높으니 어쩌니 하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 
 
왜 자살이 많을까. 꼭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도 누구라도 대강은 안다. 개인적 요인만도, 환경의 탓만도 아닌, 복합적 원인이 작용한 결과다.    
 
그렇지만 자살은 명백한 사회적 질병이다. IMF 경제위기, 쌍용차 해고 노동자, 가난하게 혼자 사는 노인이 많은 강원도 어떤 군은 자살과 연관성이 높다. 유전도, 개인의 성품과 의지력도, 외로움도, 이런 자살을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며칠 전 <뉴잉글랜드 의학잡지>에는 청량음료가 어린이의 체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한 연구가 실렸다. 네덜란드의 초등학교 학생들을 1년 6개월간 관찰한 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원문참조). 
 
한쪽은 설탕이 없는 음료를, 다른 쪽은 설탕이 들어간 음료를 준 결과, 1년 6개월간 체중이 각각 6.35, 7.37 킬로그램 증가했다. 무설탕 음료를 마신 쪽에서 체지방 증가가 35% 적었다. 
 
연구진은 설탕이 들어간 음료가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한국에서도 어린이의 비만에는 콜라나 사이다 같은 청량음료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어린이 비만 역시 얼마쯤은 사회적 질병이다. 곳곳에 자판기가 널려 있고, 매력적인 광고의 그 숨 막히는 유혹이라니. 이런 형편에 너 하기 나름이란 말은 소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다. 
 
막다른 경제적 상황과 자살, 그리고 청량음료 권하는 사회와 비만. 여기에서 경제적 형편과 청량음료가 병의 원인인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원인을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고 부른다. 결코 기억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꼭 기억해야 한다. 
 
코흐와 파스퇴르 이후 세균이나 바이러스, 유전자 같은 생물학적 요인을 찾는 것이 대세였다. 나름 성과가 있었으나, 사회적 요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해졌다.    
 
이런 시각으로 죽음과 병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가 오래다. 꼭 편작이나 히포크라테스까지 돌아갈 필요도 없다. 
 
1600년대 이탈리아의 의사 라마찌니는 직업이 병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유명하다. 또,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는 책을 통해 빈곤, 영양상태, 주거환경 등이 질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국에서도 사회적 요인 때문에 사람이 죽고 병든다는 것을 밝힌 실증 자료가 많이 있다. 소득과 학력, 사는 곳, 비정규직과 같은 직업 상태, 노동환경 등이 특히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담배를 피울 확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할 가능성, 병원에 갈 능력도 이 때문에 달라진다. 사회적 건강, 사회적 죽음, 사회적 질병, 사회적 위험…. 이런 말들이 그냥 해보는 과장이나 꾸밈이 아니다.  
 
물론 사회적 요인만으로 죽음과 병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꼭 같이 막다른 골목을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은 자살을 택하고 또 다른 이는 새롭게 삶의 의지를 다진다. 
 
스무 시간 가까이 일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주의력이 떨어지지 않고 생생하다. 건강과 질병에도 개인차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론으로나 실제로나 죽음과 건강은 개인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중요한 것은 결정요인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해결 방향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개인이 문제면 개인을, 사회가 문제면 사회를 고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를 죽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질병 중 하나는 설사병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대부분 깨끗하지 못한 물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물이 아무리 더러워도 끓이거나 정수를 하면 설사병을 줄일 수 있다. 개인이 노력해서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사회적 요인이 작용한다면 그 요인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다. 설사병을 피하려면 우물이나 수도를 설치해야 한다. 빈곤이 자살의 원인이면 소득과 일자리라는 사회적 요인에 손을 대야 한다.  
사회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병리학자 피르효가 발진티푸스 유행을 막기 위해서 소득 재분배와 토지개혁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세균이 일으키는 병조차 사회적 요인을 고치지 않고는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인식했다. 
 
사회적 요인이 중요한데, 나아가 사회적 요인이 딱 하나뿐인 원인인데, 개인에게 해답을 구하는 것이 문제다. 말하자면 사회적 문제를 ‘사사화(私事化)’하는 것이 해결을 가로 막고 있다.      
 
개인화, 사사화는 지금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노골적 경향이지만, 죽음과 질병에 이르면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멀쩡히 길을 가다가 당하는 사고에도 흔히 더 조심하지 그랬느냐는 ‘희생자 비난하기’가 뒤따른다. 자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 대책이나 정책에 이르면 더욱 심하게 ‘내 탓’에 의존한다. 환경적 요인이 매우 중요한 암도 개인이 암 검진을 열심히 받으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안전의식과 행동, 개인 보호구를 강조하는 산업안전 대책은 그 중 압권이다. 
 
정책이나 대책의 사사화가 왜 일어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 문제 해결은 대체로 구조와 근본에 도전한다. 빈곤이 그렇고 위험한 작업장 환경도 마찬가지다. 기존 질서를 흔드는 것이 어찌 달갑겠는가. 
 
현실적 문제도 있다. ‘근본적’ 해결은 많은 경우 담당자와 정책 부서의 책임과 능력 범위를 넘는다. 더구나 그 근본은 많은 문제의 같은 뿌리여서 자칫 환원주의적 단순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 
 
사회 양극화와 가난이 중요한 자살의 원인이지만 정책은 좀처럼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다. 자살은 보건 당국이 책임을 맡고 있지만, 빈곤과 실직을 건드리기에는 힘이 모자란다. 
 
사정이 이러니 죽음과 질병을 해결하는 사회적 대책은 좀처럼 구체성을 갖기 힘들다. 자살률은 이제 국제적 스캔들이 될 정도로 높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건대, 뾰족한 대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보건 당국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사회적 요인이 핵심 원인이기 때문이다. 
 
앞을 보더라도 당장은 조금 비관적이다. 건강을 위협하는 사회적 요인에 대처하는 기반은 매우 허술하다. 정책으로 좁혀 보더라도 근본은커녕 통합적 대책도 쉽지 않아 보인다(정부 부처끼리 MOU를 맺는 희극적 상황이라니).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첫 걸음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는, 조금 어렵지만 새로운 틀로 문제를 인식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죽음과 질병부터 이런 렌즈를 통해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위에 힘써 널리 알려 주시기 바란다. 인식의 틀을 공유하고 해결방법을 구해야 실마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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