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또 헛다리 짚기, 이번에는 개인정보 규제 무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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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개혁’ 또는 ‘혁신’에 따옴표를 쓰는 이유는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나 혁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과 혁신이라는 말은 이제 오염되어 오용과 남용의 대상일 뿐,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바꾸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개혁의 오·남용 시리즈, 이번에는 개인정보 규제 ‘개혁’(다시 따옴표를 쓸 수밖에 없다)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밀어붙이니(기사 바로가기),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몰라서 그러는지 난감하다. 그냥 여러 경제 정책의 하나로, 예를 들어 소득주도성장을 보완하는 혁신성장을 구성하는 한 가지 방안이나 정책으로 생각하면, 그것부터 큰 오류다. 다시 말하지만, 규제는 정책이 아니라 국정기조이기 때문이다.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적폐 청산’을 강조하는 이 정부가 지난 10년간 보수 정권이 내세운 금과옥조, 규제개혁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정부의 규제개혁 시리즈, 의료기기 규제완화, 인터넷 은행, 개인정보 규제완화는 이 정부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뻔히 문제가 있고 논쟁이 될 줄 알면서도 다시 꺼냈을 터, 이를 주도하는 정부(특히 경제부처)가 무슨 심산으로 이러는지 해석이 필요하다.

우리는 필시 둘 중 하나로 생각한다. 무신경하거나 무능하거나. 무신경하다는 것은 관료와 관료체제가 정책 실행이나 그 결과에 무관하게 계속 면피용 정책을 내놓는다는 의심이다. 이는, 지식, 경험, 권력 그 어디에서 연유했든, 이들이 여당과 청와대를 이기는 상황이라 가능하다. ‘당-정-청’의 권력관계가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살아남을 관료들은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제대로 안 되면(정책 실패), “대책 없이 반대와 저항으로 일관하는” 일부 정치세력과 시민·사회단체 때문이라고 떠넘기면 된다. 규제완화가 실패로 돌아가면, 필시 그 원인은 불완전한 규제완화라 하고, 처방은 더 완전한 규제완화라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관료체제의 특징이자 전략이다.

 

무능은 당-정-청 모두에 해당한다. 성장, 혁신성장, 내포적 성장, 이름은 무엇이든, 심지어 과거 녹색성장이나 창조경제를 호명할 때도, 변함없이 규제 개혁을 과녁으로 삼아 한 가지로 강조하고 외쳤다. 진단하자면 그것 빼고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다는 고백이 아닌가 싶다.

현재 집권한 정부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경제 관료와 대기업, 학자, 언론이 ‘체제’ 또는 ‘동맹’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었으니, 이들은 주류 경제권력으로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이들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구상하고 제안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이후 20년째 아무런 대안이 없으면서 시장과 규제완화 탓만 하고 있으니, 총체적 무능이라 할 수밖에.

 

아, 규제 말고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대안 정책이 한 가지 더 있기는 하다. 바로 연구개발(R&D) 투자 확대. 오늘 <논평>의 주제를 벗어나긴 하지만, 이 또한 증명되지 않은 선언 비슷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수없이 나온 정책 페이퍼를 보라. 모호하고 공허하다.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이미 총액 기준(국내총생산 대비 퍼센트나 국민일인당 액수가 아니라!) 세계 5위 규모다(자료 바로가기). 영국, 프랑스, 캐나다를 가볍게 제치고, 4차 산업혁명의 원조 독일에 육박하는 수준. 연구개발비 투자가 이처럼 많은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더 하자는 것인지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개인정보가 왜 중요하고 제대로 보호되어야 하는지, 자세하게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한참 전, 지난 2013년 10월의 <서리풀 논평>을 참고하기 바란다(논평 바로가기). 워낙 사고가 잦아 이제 한국 사람은 좀 무뎌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많은 국제 동향과 표준을 참고하는 것이 감각을 되살리는 길이다.

이 중요성 때문에 이번 규제 완화 선언에는 아예 조건이 붙었다. 대통령이 직접 “개인정보의 안전장치는 강화해 훨씬 더 두텁게 보호하겠다. 익명정보만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방어선을 쳤으니, 그나마 좀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사태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규제 완화의 보완책이라고 말했겠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 어떤 실효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개인정보 보안은 대부분 기술보다는 사람이 문제이고, 따라서 어떤 장치도 사람의 실수와 탐욕 앞에는 안전하다 장담할 수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안을 포기한 신용카드 정보는 무슨 기술적 안전장치가 없어서 그랬을까.

‘익명화’는 개인정보 보호에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되지 못한다. 정보가 그냥 돌아다니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지, 익명으로 처리해도 개인은 그대로 살아있고 추적되며 (코드 한 줄로, 변수 하나로) 다시 특정할 수 있다. ‘가계동향조사’처럼 통계청이 내는 집합적 통계와 혼동하지 말자.

 

기술보다 사람이 문제이니, 개인정보를 익명으로 변환하는 단계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무슨 수로 보장하나? 정보 전문가가 말하는 것은 일부다. “비식별 조치는 가장 먼저 데이터 내에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찾아내 삭제하거나 암호화하는 등 17가지 기술을 활용한다”(기사 바로가기). 그 뒤에 따라붙는 과정은 이론일 뿐, 각 과정에 등장하는 사람, 그리고 이들의 실수와 오류, 잘못이 더 중요하다.

익명 정보 자체도 안전하지 않다. 많은 정보를 모으면 모을수록 그에 해당하는 개인을 찾아내기는 쉽다. 인구 3만이 안 되는 지역에 사는 50대 여성이 남다른 병으로 어떤 병원에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는다면, 개인정보 없이 그 사람을 찾는 것은 일거리도 아니다.

물꼬를 트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정보 산업과 경제, 돈벌이가 목적인 한, 개인정보 ‘체계’가 시장에 더 많이 노출되고 데이터도 이에 맞추어 ‘진화’한다. 개인정보가 시장을 만들고, 그 시장은 다시 개인정보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체 국민에 대한 건강보험 정보는 제도 운영과 관리를 위해 출발했지만 이제 시장에 노출되었다. 당국은 유례없는 빅데이터라고 그 가치를 홍보하는데, 제약과 민간보험은 어떻게든 이를 활용하려 유·무형의 압력을 가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건강보험의 반응은? 여기에 정치적 압력까지 더하면? 우리는 지금 다시 등장한 개인정보 규제완화의 핵심 대상 중 하나가 건강보험 정보라 확신한다.

또 다른 예. 현대중공업, 카카오, 아산병원이 손잡고 의료 빅데이터 사업에 진출한다니(기사 바로가기), 이 빅데이터가 더 좋은 ‘상품’이 되려면 카카오가 모으는 정보와 병원의 환자 정보는 어떻게 연결되며 가공될까? 100억 원이나 투자했으니 뭔가를 팔아야 할 터, 제약사나 민간보험에 팔만한 상품을 만들려면 이 빅데이터는 어떤 정보를 포함하려고 기를 쓸까? 법과 관료적 감독체계만으로 개인정보 보호의 압력을 이길 수 있을까?

 

문제는 미래 변화까지 포함하는 시스템의 운동과 그 법칙성이다. 경제와 산업이라 했으니 수익성이 최우선일 터, 데이터 생산자는 수요자의 입맛에 맞는 데이터를 생산하는 방향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국민과 환자의 편의를 앞세워도 그 편의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 핵심은 시장과 수익이다. 지금 당장 작동하는 법과 규제보다 끊임없이 이를 공격, 해체하려는 시장과 자본의 경향성, 운동이 더 중요하다.

한 가지 더, 우리는 혁신성장의 가능성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규제 개혁 ‘만능론’의 공통 한계를 그대로, 개인정보 규제완화가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뭉뚱그려 ‘관련 산업 육성’이고 ‘데이터 산업 활성화’이지, 수긍할 만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내세우느니 ‘세계 시장’이나 ‘국제 경쟁력’과 같은 수사일 뿐, 디테일은 허무할 정도로 빈약하다.

멀리 갈 것 없이, 대통령이 참석한 규제완화 행사에 불러 모은 사례를 보자. 동력을 얻기 위해 고르고 고른 것이 ‘소상공인의 상권 분석과 매출 동향 파악을 위한 케이웨더와 신한카드 서비스’, ‘허위매물을 걷어낸 중고차 거래’, ‘증강현실을 활용한 실내공간 정보 서비스’ 등이다(기사 바로가기).

대통령 행사에 동원한 최대, 최고 사례치고는 참으로 궁색하다. 개인정보 규제완화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지금 필요한 대부분 정보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냥 넘어가자. 경제 측면에서 이게 무슨 산업이 되고 성장동력이 된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고리를 알 수 없는 점이 진짜 문제다.

소상공인, 중고차 거래, 실내공간 정보업체가 더 많아지고 매출이 늘어난다는 뜻인가, 아니면 개인정보를 활용한 정보통신 서비스업이 발전한다는 의미인가? ‘데이터 산업’ 성장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가? 누가 무슨 돈을 어떻게 벌고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개인정보 규제를 풀면 어떤 결과와 성과를 산출하는지, 제발 말이 되는 논리적 설명을 부탁한다.

 

성장 목적이 아니라 국민과 소비자가 더 편리해지지 않느냐고? 정말 국민의 편의가 주 관심이면 정말 필요한 다른 과제부터 해결하라. 중고차 거래를 안심하려면 개인정보에 앞서 업체에 대한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

민간 의료보험이 시시콜콜 개인정보를 활용하려는 목적이 가입자를 보호하려는 것인가 배제하려는 것인가? 민간보험사의 수익 증대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개인의 의무기록을 공동으로 활용하는 것보다는 의료전달체계와 일차의료 강화가 더 시급하다.

개인정보 규제를 푸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도 명백히 경제와 산업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전체 산업과 경제, 이른바 ‘국민경제’라는 보편성이라도 있으면 또 모를까, 이 경제는 일부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약간의 편익이 있더라도 일부 산업과 대기업의 이익에 봉사할 뿐이다.

단언컨대, ‘실사구시’는커녕 또 잘못 짚었다. 국민의 편의를 위해서도 성장을 위해서도 규제 개혁의 기조를 전환하라. 개인정보 규제완화도 말이 안 된다. 정책의 목적과 그것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 후, ‘근거(evidence)’에 기초한 정책을 내놓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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