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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시간 단축’을 넘어 ‘자율적 노동의 확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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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후 (시민건강연구소 영펠로우)

 

근로기준법에 주 40시간 근로가 명시된 것이 2003년이다. 그러나 개정 근로기준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지난 몇 달 간의 논쟁을 보면 마치 한국의 근로기준법이 원래 ‘주 68시간’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었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엄연히 기준은 40시간이고 그럼에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연장근로의 한도를 줄인 것뿐인데, 언론은 ‘주 52시간 근무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고 재계는 아우성을 치며 정부는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이렇게 노동시간 단축을 강화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인 한국의 근로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2017년 기준 한국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2024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59시간을 훨씬 상회한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길다(☞관련 자료). 노동 시간 단축은 300인 이상 사업장에 우선 적용되지만, 점차 확대되어 2021년 7월 1일부터는 5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적용될 예정이다.

 

노동 시간 단축은 아직까지 엇갈린 반응을 얻고 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노동 시간 단축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정 근로기준법에 대해 ‘잘된 일이다’라고 평가한 비율은 64.2%로 부정적 평가보다 많았다. 그러나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삶의 질 변화에 대해서는 ‘이전과 별 차이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과반을 차지하는 등 아직까지 변화를 체감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관련 자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노동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노동 시간을 더 엄격히 통제당하거나 직장 외 장소에서 추가로 일을 하는 등 업무 부담이 오히려 심해졌다는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다(☞관련 기사).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의 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과도한 근로 시간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근로 환경이 노동자의 건강 수준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

 

지난 5월 국제학술지 <작업과 환경의학>에 실린 한림대 조성식 박사팀의 논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바로 가기 : 주관적 건강에 대한 장시간 근로와 낮은 직무 통제력의 결합 효과 : 상호작용 분석). 연구팀은 전국 대표 표본조사인 <제3차 한국 근로환경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주 35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들을 선별하고, 그 중에서 주당 근로 시간이 52시간을 넘는 경우를 ‘장시간 근로 집단’으로 정의했다. 또한 자신의 일에 대한 중요한 결정에 스스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거의’ 또는 ‘전혀 그럴 수 없다’고 인식하는 경우를 ‘직무 통제력이 낮은 집단’으로 정의했다.

연구팀은 우선 ①장시간 근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 ②직무 통제력이 낮은 집단과 높은 집단 사이에, 자가평가 건강 수준의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시간 근로와 낮은 직무 통제력 상황을 함께 경험할 경우, 둘 중 하나만을 경험할 때보다 자가 평가 건강수준이 더욱 낮아지는, 일명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지 검토했다.

분석 결과, 장시간 근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서 자가 평가 건강수준이 더 낮았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력이 낮다고 인식하는 집단은 통제력이 높다고 인식하는 집단에 비해서 자가 평가 건강 수준이 낮았다. 즉 장시간 근로나 업무에 대한 통제력이 낮은 상황 중 하나만을 경험해도 자가평가 건강 수준이 낮아지는 것이다.

한편 똑같이 장시간 근로를 하는 경우라도, 자신의 업무 통제력이 낮다고 인식하는 이들은 업무 통제력이 높다고 인식하는 이들에 비해 자가평가 건강 수준이 더욱 낮았다.

또한 장시간 근로 집단은 업무 통제력이 낮거나 높은 상황 모두에서 장시간 근로를 경험하지 않는 집단에 비해 자가평가 건강 수준이 낮았으나, 업무 통제력까지 낮은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장시간 근로와 낮은 업무통제력 두 가지 모두가 자가평가 건강 수준 저하와 관련 있으며, 특히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동하는 경우 그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고 해석했다.

 

이 연구는 현재 근로시간 단축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근로 시간 단축 문제를 ‘노동자의 실질 소득 감소’ 혹은 ‘기업의 비용 증가’ 같은 금전적 관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노동자 건강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건강 훼손은 당장의 금전적 손실을 넘어서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근로 시간 단축은 시작은 최종 목표가 아니라 일터를 건강하게 만드는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근로시간 단축에서 그치지 않고, 노동자 개개인의 자율권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업무 시간의 유연성, 업무량과 휴식의 균형, 업무의 방식 등 근로 환경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노동자 자신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삶의 질 향상이라는 노동 시간 단축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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