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가정 폭력은 공중 보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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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연구通] 가정 폭력에 맞서는 의료 개혁 방향

 

류한소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1/3 이상의 여성이 신체적, 성적 폭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이것이 중요한 공중보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중에서도 배우자, 연인 등에 의해 가해지는 ‘친밀한 관계 내에서의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 IPV)’ 혹은 가정 폭력은 가장 흔한 형태의 젠더 폭력이다(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를 묶어 ‘가정 폭력’으로 지칭하겠다).

 

WHO는 가정 폭력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보건의료 체계 개혁이 필요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학대를 경험한 여성은 신체적, 정신적, 성적 측면과 재생산 측면에서 해로운 건강 영향을 받으며 광범위한 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건강 효과는 폭력을 당한 직접 피해자뿐 아니라 가정 폭력에 노출된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훨씬 많은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의료진은 여성과 자녀들의 학대 경험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의료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둘째, 이러한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보건의료서비스는 이들이 폭력 경험을 털어놓고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앞선 이유의 연장선상에서, 학대를 경험한 여성들이 때로는 의료진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로 인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제 학술지 <호주 건강 리뷰(Australian Health Review)>에 실린 뉴사우스웨일즈 대학 조 스팬가로 교수의 논문은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그간의 연구들을 종합했다. 보건의료체계가 가정폭력 피해자의 피해를 줄이는 데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 근거자료를 평가한 것이다. 저자는 2005년 1월부터 2014년 8월까지 발표된 총 1671편의 영어 논문들을 검토하고, 가정 폭력에 보건의료체계가 개입할 수 있는 대응 방안을 아홉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했다(☞논문 바로 가기 : What is the role of health systems in responding to domestic violence? An evidence review).

 

첫째, 피해자들이 처음 접하는 일선에서의 대응(first-line response). 
이 단계에서 보건의료체계는 학대당한 여성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도움이 되는 정보와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 법적, 경제적 조언, 주거와 양육 지원, 안전 행동에 대한 교육이나 심리적 개입 같은 자원에 대한 접근이 여기에 포함한다. 이러한 일선 대응이 효과적이라는 근거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둘째, 가정 폭력에 대한 규칙적 스크리닝.
현재 또는 최근 파트너의 학대 여부에 대해 여성에게 규칙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보건의료체계가 가정폭력에 개입하는 방법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대응법이다. 먼저 물어보지 않으면 여성이 학대 사실을 스스로 털어놓지 않는다는 점, 보건의료 전문가와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피해 경험을 털어놓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규칙적으로 꾸준히 피해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스크리닝의 목적은 보건의료 전문가가 해당 여성의 피해 경험을 빨리 알아차리고 관련된 위탁기관으로 연결하거나, 피해자의 건강 문제에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는 데 있다.

 

셋째, 가정 폭력의 위험을 평가하고 피해자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
피해 경험을 털어놓은 사람에게는 앞으로의 피해 위험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 평가 과정은 피해 경험을 말하기로 결정한 사람의 민감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취약성을 돌볼 수 있는 속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더불어 안전 계획을 세우는 것은 피해자들이 폭력의 위험을 판단하고, 경고 신호를 식별하고, 폭력이 임박하거나 일어나는 중일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획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의료전문가와 피해 당사자가 함께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개입들이 그런 예이다.

 

넷째, 가정 폭력이 발생한 이후의 상담.
이 시기에 필요한 개입은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를 줄이고 피해자의 안전, 가해자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위한 상담이다. 선행연구들은 이때의 상담 개입이 피해자들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을 줄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 기능, 자녀의 안전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다섯째, 여성과 자녀 모두에 대한 개입.
호주에서는 4세 미만 아동 중 1/4이 가정 폭력에 노출되는데, 이들은 이후 장기간에 걸쳐 심리적, 발달적, 행동학적 문제를 겪는다고 한다. 가정 폭력이 발생한 후 엄마-자녀가 함께 참여하는 개입을 시행한 결과 그렇지 않은 대조 집단에 비해 자녀와 엄마 둘 다 트라우마와 관련된 스트레스 수준이 낮아지는 것을 보고한 연구들이 있다.

 

또한 선행연구들은 이러한 엄마-자녀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개입에 여러 물질적, 제도적 자원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이후 겪게 될 장기간의 심각한 건강 피해와 관련 비용을 고려하면 오히려 이러한 초기 대응이 비용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여섯째, 가해자에 대한 대응.
학대를 줄이거나 멈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가해자 치료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는가에 대한 근거는 아직 부족하여 분명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가해자와 직면했을 때, 많은 가해자들이 타인(특히 피해자)에게 책임을 투사하면서 그들 자신을 학대의 피해자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상황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에 의료전문가가 해당 남성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를 식별하도록 돕는 트레이닝은 이후 해당 전문가가 가정 폭력을 ‘당한’ 남성에 대한 개입에서 확신을 가지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일곱 번째, 아동 보호 통지(Child protection notifications). 
아동이 가정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법적으로 아동보호 통지가 요구되는 일종의 아동 학대일 수 있다. 법적인 아동 보호 대응은 종종 자녀 보호라는 어머니의 책임성에 집중하고 가정 폭력에 대해서는 부족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동 보호 부문과 가정 폭력 부문 간의 협력이 필요하고 보건의료체계는 그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여덟 번째, 의료 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트레이닝.
폭력 경험자를 식별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개선하기 위한 트레이닝이 중요하다는 점을 여러 연구들이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트레이닝은 피해자와 직접 대면하는 일선의 직원들부터 고위 간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보건의료 인력들에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보건의료 전문가 개개인을 넘어서 병원 부서 수준과 보건의료체계의 장벽을 다루지 않고서는 실행력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연구 결과들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보건의료체계 수준의 대응.
가정 폭력에 대응하는 보건의료체계 내에서의 프로토콜의 효과에 대한 근거는 아직 많지 않다. 그러나 폭력 피해자의 식별과 전문 기관으로의 위탁, 의무기록에 학대 경험 작성 등 시스템 수준에서의 대응이 가정 폭력의 피해를 줄이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는 근거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 지원 기간들 사이의 정보 공유는 환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핵심적 실천으로 여기는 보건의료 부문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를 다루기 위한 프로토콜 또한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보건의료체계의 대응은 비단 가정 폭력 피해자뿐 아니라 다양한 건강 피해에 직면한 이들을 돕는 데 보건의료체계가 할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또한 이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보건의료 각 분야와 수준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에게 세밀하고 꾸준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이는 비단 보건의료체계 내의 구성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다움을 기준 삼아 단죄하려는 사법 체계, 정치 체계, 그러한 편견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일상 문화에 이르기까지, 폭력의 발생을 막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젠더 폭력과 관련한 모든 체계 내에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어쨌든 이 논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하는 일차적 관문이자 창구로써, ‘최소한’ 보건의료체계 안에서 젠더 감수성을 높이고 젠더폭력을 다루기 위한 트레이닝을 실시하는 것, 그리고 보건의료체계 안에서 대응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한국에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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