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보도한 불법 대리수술의 실상은 놀라움 그 이상이다(기사 바로가기). 일부 의사들의 ‘일탈’이나 ‘편법’ 정도로 알았지 사태가 이 지경까지 갔을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의료기기 영업사원이 의사 대신 수술하는 곳이 적지 않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의사협회가 사과했다고는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의사와 병원들의 반응이 또 한 번 놀랍다. 적어도 ‘극소수’는 넘는다는 소리가 여러 군데서 들리건만, 정말 이상한 의사 몇몇이 저지른 일이지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고 넘어가려 한다. 모든 문제가 낮은 수가 탓이라는, ‘기-승-전-수가’의 논리도 빠지지 않는다.
업체 직원이 수술장에 들어와 장비나 기구 사용법을 설명해주면 의사가 수술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항변이 가장 놀랍다. 언뜻 들으면 마치 협업이나 지원처럼 들리지만, 이는 의사가 자기가 쓰는 장비나 기구를 충분히 익히지 않고 수술에 나섰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도 괜찮은가.
몸과 건강을 맡긴 환자 관점에서 생각하면 간단하다. 사소한 사용법 같은 것은 의사가 잘 모를 수 있다고? 환자의 생명이 달린 문제인데 사소한 것이 어디 있느냐고 의사들이 늘 항변하지 않았던가. 수술실에 들어와서야, 업체 직원이 도와줘야, 기구와 장비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 숙련도를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우리는 업체 직원이 아니라 경험 많은 다른 의사가 수술에 참여해 도움을 주는 것조차 정확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리적 잣대가 가장 중요하다. 의사가 새로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는 데는 이런 방법만 한 것이 없겠으나, 수술대에 누운 환자로서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
어느 쪽이든 기본은 헛갈릴 것이 없으니, 대부분 의사가 학생 시절부터 배우는바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는 의료윤리 원칙. 의사가 ‘경험’을 쌓고 ‘실력’을 기르느라 환자와 최선의 치료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지노선이다.
현실은 항상 그런 원칙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원칙조차 없거나 무시하는 것, 또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 ‘무원칙’이 극소수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젊은 의사를 양성해야 하느니, 새로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경험 쌓을 기회가 있어야 하느니, 숙련도를 높이는 과정이니 하는 그 무엇보다 환자 중심이 우선순위가 높다.
대리수술이 문제가 되면서 해결책을 둘러싼 논란(예를 들어 CCTV 설치)이 무성하지만, 오늘 우리는 좀 더 근본적으로 대리수술이 왜 문제인가를 먼저 물으려 한다. 모두가 집중하는 ‘불법성’은 피상적인 판단 기준일 뿐 이게 왜 문제인지 본래의 입법 취지까지 드러내지는 못한다.
의료인이 아닌 사람이 의료행위(이 경우는 수술)를 하지 못하게 법률로 정한 이유, 그 출발은 환자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인 용어와 개념을 쓰면, 모든 의료는 ‘양질’이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일차적인 제도 장치가 이런 법과 규제다.
불법 여부에 끝나지 않고 그것을 왜 불법으로 정했는지 근본을 생각하면, 불법 대리수술은 양질이 아닌 의료의 ‘저질’ 의료의 한 유형으로 전환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좋지 않은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거나 양질이 아닌 치료가 될 공산이 큰 의료다.
대리수술 이외에도 질 낮은 의료는 범위가 넓다. 대표적인 것이 병을 치료하러 간 병원에서 죽거나 다치는 경우. 사실 그 크기로만 보면 대리수술은 문제라고 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가수 신해철의 죽음을 기억하는지? 당시(2014년 11월) <서리풀 논평>에서는 이렇게 말했다(바로가기: 서리풀논평, 프레시안 , 라포르시안).
모든 것을 뭉뚱그려 환자의 안전 문제라 하면, 경고가 나온 지는 오래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 병원에서 예방할 수 있는 안전사고로 사망하는 환자 수가 한 해 4만 4천 명에서 9만 8천 명에 이른다는 것(1999년 미국의학연구소 보고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더 하면 더 했지 한국이라고 다를까. 외국과 같은 비율로 추산하면 한 해 동안 1만 7천여 명의 환자가 예방할 수 있는 안전사고로 사망할 것이라고 한다(울산대 의대 이상일 교수). 그러나 이에 대한 관심과 조치는 아직 빈약하다. 치료의 조건과 환경, 제도의 측면에서는 더 그렇다.
우리는 문제의 크기 때문에라도 불법 대리수술 사건에 대한 논란이 환자 안전과 양질의 의료에 대한 관심과 대책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불법과 대리도 결국 환자가 죽고 다치는 것이 문제니, 근본적으로는 환자가 더 좋은 진단과 치료를 받는 데 관심을 두자는 것이다.
양질의 의료로 문제를 확장해도, 질만 괜찮으면 불법과 대리가 용인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리수술을 하는 사람이 오래 잘 훈련을 받았으면 의사보다 더 양질의 의료를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이런 논리가 ‘비제도권’ 의료가 권리를 주장하는 한 가지 이유다(기사 바로가기).
이런 논란을 길게 이어갈 여유가 없으나, 의료가 양질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사회적으로 이를 일관되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만 짚는다. 30년을 연마한 영험한 방법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음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면, 그 결과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대부분 나라가 의료인 면허제도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어느 한두 개인의 실력을 따지는 것이 아닌, 집단과 사회가 일관되게 안전을 확보하는 방식이 제도이고 체계다(전문 용어로는 ‘구조적 질 관리’라 한다). 면허나 전문의제도 같은 구조적 장치가 의사와 의료인의 질을 보증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임을 거듭 강조한다.
문제는 이런 둔탁한 제도만으로 양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면허만 있고 제대로 지식과 기술, 태도, 윤리를 갖추지 못한 의료인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존재한다. 무슨 평가니 조사니 할 것도 없다. 쉽게 만나고 볼 수 있으니, 현실 경험이 곧 생생한 근거다.
제도를 좀 더 정교하게 만들어도 한계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비슷하게 시행 중인 ‘의료기관인증평가’(자료 바로가기) 또한 면허제도보다 조금 나은 정도지 둔하기는 마찬가지다.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하더라도, 수술하는 의사가 정말 성심성의를 다하는지 온 힘을 다해 수술에 집중하는지,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인가. 간호사가 환자의 고통에 신경을 쓰고 공감하게 강제하는 제도, 규정, 처벌, 교육이 가능한가.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사회는 통제보다는 시장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의료인과 병원의 질을 평가하고 발표하자고 하고, 이를 통해 경쟁시키고 도태시키자고 주장한다. 기술과 데이터로 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한 데, 어디에 그런 성공 사례가 있는지 묻는다. 우리가 아는 한, 유감스럽게도 그런 방식이 성공한 사회와 체제를 찾기 어렵다.
환자 안전을 확보하고 양질의 의료를 보증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한 2014년의 <서리풀 논평>에서 주장한 내용을 되풀이한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우리는 장기적으로 제도와 시장, 개인을 매개하는 ‘제도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도 신뢰란 보건과 의료를 둘러싼 유·무형, 거시·미시, 개인·집단·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인 사회적 자산을 가리킨다(논문 바로가기). 여기서 제도는 ‘가족제도’의 제도처럼 법과 정책뿐 아니라 문화, 규범, 태도, 가치 등을 포함하는 폭넓은 것이다. 제도 신뢰란 예를 들어 환자들이 보기에 의사들이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병원은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 민간요법이나 건강식품도 정당한 기능을 한다는 생각 등.
양질의 의료와 제도 신뢰를 연결하는 이유는 제도 신뢰가 없이는 질을 높이려는 어떤 노력도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환자와 의료제공자 모두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충실한 의무기록이 처벌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보상(심리적 보상 포함)을 받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의무기록의 질이 달라진다.
이 때문에 특별히 공공의료와 의료의 공공성 강화가 체제 신뢰와 연관된다는 것을 덧붙인다. ‘체제적’으로 영리에 대한 동기가 적고 건강과 회복에 대한 관심이 클수록 관련자 모두의 제도 신뢰는 커진다. 한국 의료의 공공성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CCTV로 수술실을 중계하지 않아도 의심이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