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국정감사를 보면서 – 국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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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도 더 지난 2012년 6월에 내보낸 <서리풀 논평>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논평이 발표된 것은 새로운 국회가 개원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주 관심은 국회의 기능을 옹호하면서 또한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때와 문제의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좀 길더라도 다시 생각해 주시길 부탁드린다(서리풀 논평, 프레시안 바로가기).

국회는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이론을 동원할 것도 없이 정치, 경제, 행정, 사법, 언론, 학술, 문화, 그 모든 영역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표되지 못한다….

(중략)

…건강과 보건의료도 다를 바 없다. 영리병원과 외국인 투자, 의료관광은 어떤 공론의 장에서도 ‘과잉’ 대표된다. 의사와 약사, 병원, 제약회사는 튼튼한 조직과 압도적 자원,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졌다. 진료비 인상, 약가 인하, 의약품 슈퍼판매, 어떤 문제라도 이들이 가진 권력과 무관하게 결정되기 어렵다.

첫 번째 이유가 ‘권력’의 균형 장치라면, 국회의 두 번째 가치는 민주주의의 실천장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핵심 제도이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전제한다면, 국회는 여론을 반영하고 정치교육의 통로가 되며, 대표 기능을 통하여 정책과 법률의 토대를 만든다.

한국에서 대중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법률이 얼마나 비민주적인지는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건강과 보건은 전문성이 높다는 이유로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대중의 무지와 무관심을 탓하지만, 제도와 환경이 더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한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둘 다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국회가 보여야 할 가치를 더 꼽을 수는 있어도 이 보다 줄여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국회는 어떤가,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가, 아니면 이와는 무관한 천덕꾸러기일 뿐인가.

 

 

대부분 독자가 알아차렸겠지만, 지금 국회를 다시 말하는 것은 한창 진행 중인 ‘국정감사’ 때문이다. 국정감사는 국회와 의원의 정치가 유권자와 주권자에게 직·간접으로 전달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자 실천 현장이다. 흔히 관심을 두는 국회의원의 공익 지향과 ‘실력’만이 아니다. 정치적 실천의 정도와 수준은 물론이지만, 지향과 목표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감스럽지만,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과거와 크게 다른 성의와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듯하다. 사립 유치원의 재정 비리를 폭로한 한 의원은 ‘스타’가 되었다지만, 거기에만 관심이 쏠려 다른 의원의 활약이 묻힌 것 같지도 않다.

큰 비판을 받았던 과거 행태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의원도 적지 않다. 질문이나 지적만 하면 그만이라는 독불장군식 주장에다, 아무 대안 없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이기만 하는 사례도 비슷하다. 사소한 개인 관심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민원형 감사도 줄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조직이나 기관의 감사가 해야 할 것 같은 시시콜콜한 지적으로 ‘언론 플레이’에 몰두하는 일이 가장 실망스럽다.

 

우리는 국정감사가 계속 지지부진한 것이 우연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무수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있는데도 달라지지 않는 그 ‘지속성’이야말로,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가 원인으로 도사리고 있음을 웅변한다.

구조적 문제라고 전제하고 크게 두 가지 정치적 과제를 지적한다. 금방 해결방법을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지만 그렇겠거니 포기할 수도 없다. 국회를 통한 정치가 국회와 의원에게만 맡겨져 있지 않다는 현실 정치의 구조에 기대를 걸면서, 유권자의 힘을 통한 국회의 변화를 희망한다.

 

첫째, 정책과 정치의 의제 설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정책과 행정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전문화하며, 많은 나라에서 행정부와 비교하여 의회의 힘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나, 그렇다고 국회의 정치적 사명이 면제될 수는 없다.

그 말썽 많은 소득주도성장만 해도 행정부가 주도한 정책이고, 국회는 이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실천이 대부분이다. 보건의료 분야의 문재인 케어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의 재정 예상이 맞느니 틀리느니, 보완책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정도가 국정감사와 국회의원의 정치적 실천을 가름한다.

행정부와 관료체제가 주도하는 정책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왜 아닌가, 많은 돈을 쓰고 국민의 삶과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관료와 행정 권력이야말로 사회와 개인에 직접 개입한다.

문제는 입법부가 흔히 행정부에 대해 ‘반응적(reactive)’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해진 프레임과 패러다임 안에 머문다는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정책에서 반응적 수준에 머물면 기껏해야 정책 일부를 (그것도 사소한 수준에서) 수정할 수 있을 뿐 근본 틀은 건드릴 수 없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문재인 케어’나 ‘치매국가책임제’에 매몰된 채 더 근본적인 건강보장체제 개혁을 말할 수 있겠는가.

더 중요한 한계는 행정부가 하지 않는 것과 없는 정책, 즉 ‘부재(不在)’를 의제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보건 분야만 해도, 예를 들어 건강보험이나 의료급여 그 이상의 건강보장제도로 나아가는 제안, 또는 지지부진한 정신보건체계 강화 같은 것은 부재의 영역에 속한다. 반응적(또는 수동적) 실천이 아니라 ‘능동적(proactive)’ 실천이라야 이런 의제로 행정부를 끌어당길 수 있다.

 

둘째, 국회는 더 높은 전문성과 기술 수준 또는 정책 능력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정치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사립 유치원 비리 문제가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이 한 개인 국회의원이 가진 기술과 전문성의 문제이던가. 국회가 가질 법한 정치적 권력의 원천은 유권자와 대중의 지지, 그들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공적 가치와 공공선의 실천이다.

이런 종류의 정치적 권력은 행정부와 사법부, 관료와 연구자, 언론, 국제기구, 그 누구보다 국회와 국회의원, 정당에 유리한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을 비판하는지 민감할수록, 그에 기초하여 사회 권력의 ‘대표성’을 인정받을 때 그에 바탕을 둔 정치권력이 성장할 수 있다.

국민연금에 대해, 장기요양보험에 대해, 그리고 치매관리에 대해 국민들이 무엇을 아쉬워하고 어떤 것을 원할까? 노인 빈곤과 청년 실업에 대해서는 무슨 말과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쇠퇴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무슨 불만이 가장 클까? 지금 나와 우리의 정치적 대표가 누구라고 생각할까?

(행정부가 꺼내지 않은) ‘부재’ 상태를 의제로 만들고 정치적 과제로 프레이밍 하는 일, 그리하여 행정부가 반응을 보이고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국회의 장기가 되어야 한다. 정치 고유의 기능이다. 장담하지만, 행정부는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능력이 없다. 워낙 정치가 할 일이라 생각하면, 스스로 행정부의 기능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이는 오로지 국회의 일, 국회의원이 해야 할 고유의 역할과 기능인 것이 맞다.

 

온전한 의제 설정 능력과 정치력은 장기 과제인 것이 맞지만, 국정감사는 그 길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부분적 실천과 성취의 장이다. 많이 남지 않은 국정감사 또한 예외가 아니며, 지금도 늦지 않았다. 감사원이나 정부 부처 감사실이 해야 할 일, 민원인의 청탁, 기자의 취재 같은 것이 아니라, 마땅히 국회가 해야 할 ‘고급’ 정치에 집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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