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영리병원의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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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 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영리병원 이야기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하고 설명했기 때문에 자칫 쓸 데 없는 말만 보태기 쉽다.  
 
그렇지만 좋건 싫건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영리병원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겹치고 지루하더라도 곱씹고 또 씹어야 할 만큼 중요해서다.    
 
영리병원이 한국의 의료와 환자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료비 폭등, 낮은 질, 계층간의 불평등, 의료체계의 왜곡을 불러올 것이 명백하다. 
 
이런 점에서 영리병원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문제 많은 정책이다. 우석균과 신영전이 최근에 프레시안(바로가기)과 한겨레(바로가기)에 구구절절이 써 놓은 대로다. 그러니 여기서 어이없는 정책과정과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되풀이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시민사회진영은 이미 참여정부 시절부터 영리병원 도입을 꾸준히 반대해왔다 >
(사진출처: 민중의 소리)
 
우리는 새롭게 영리병원의 도덕성을 물으려 한다. 담배농가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도록 조장할 수는 없다.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무기산업을 키우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설사 몇 가지 도움 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영리병원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영리병원은 그야말로 극소수 재벌과 상업자본의 이득 빼고는 무슨 가치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꼭 그게 아니라도 정책의 ‘도덕적’ 기반은 ‘경제적’ 기반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법으로 영리를 어떻게 규정하든, 영리병원은 돈벌이를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병원이다. 이미 모든 병원이 돈벌이를 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영리를 기관 존립의 ‘첫째’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영리병원은 투자자에게 배당을 할 수 있게 허용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허용’이 아니라 배당할 이익을 남기기 위해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잃으면 영리병원의 존립 근거는 사라진다. 다른 일은, 환자 진료를 제대로 하는 것을 포함해서, 돈벌이에 지장이 되지 않는 한, 아니 지장이 되지 않을 만큼만 하는 것이 기본 원리이다.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도, 인간적인 진료를 하는 것도, 그 어느 것이든 부차적 목적이다. 영리라는 목적을 좀 더 잘 수행하도록 하는 ‘하위목표’에 그친다. 따라서 무슨 말로 설명하더라도 영리병원이 돈벌이를 위한 병원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사실이 의심스러우면 미국 영리병원의 실상을 다룬 뉴욕타임즈의 2012년 8월 기사도 참고할 수 있다 (바로 가기1. 바로가기2).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벌이가 죄가 되느냐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리 행위는 많은 사회, 경제적 활동의 일차적 목적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을 만하다. 환자를 치료해서 돈을 버는 것이 다른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했다. 그의 논법을 빌리면 좋은 치료는 그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에 속한다. 정상 기능인 다른 사람의 콩팥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콩팥을 돈으로 사는 것을 반대한다. 정확한 논리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불편하고 반감이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왜일까? 샌델은 이를 공정성과 가치의 문제로 설명한다. 
 
콩팥을 파는 사람이 궁핍하고 불리한 조건에서 할 수 없이 그런 결정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공정성의 문제다. 자본주의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와 이윤 추구는 공정해야 한다. 많이 기울지 않는 대등한 처지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파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겉모양이 어떻더라도 강요이고 강제다. 따라서 부도덕하다. 그런 점에서 공정성은 시장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근거이다. 공정함을 얻기 위해 약자는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국가가 개입한다.     
 
공정하더라도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매매가 그렇다. 가령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어떤 종류의 강제성이 없다 치자. 그러나 그 경우에도 성을 사고파는 것을 정당하다고 선뜻 말하기 어렵다. 성이 상품화되는 것은 또 다른 가치의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공정하게’ 콩팥을 사고팔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장기를 매매하는 것은 몸과 사람의 생명, 건강의 가치를 물건과 상품으로 변질시키고 왜곡한다. 사람의 장기조차 화폐가치로 바뀌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우리의 도덕적 감성은 여기에 저항한다.      
 
영리병원은 치료와 건강 회복을 돈으로 사고파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말이다. 콩팥이나 성을 사고파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것의 도덕과는 또 무엇이 다른가 물어야 한다. 
 
영리병원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기준, 공정성과 가치의 문제에서 모두 걸린다. 우선 영리병원은 공정한 환경에서 대등한 거래를 통하여 공정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주류 경제학자도 인정하듯 의료를 제공하는 쪽(병원이나 의사)과 환자는 대칭적인 처지에 있지 않다. 의사가 수술을 하라고 하는데 여러 곳을 둘러보고 와서 결정하겠다는 환자는 상상하기 어렵다. 자기공명영상(엠알아이, MRI)을 찍어야 한다는 의사에게 혼자 판단으로 안 찍어도 될 것 같다는 사람도 없다. 
 
환자는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는 한 쪽 주체가 아니다. 굳이 거래라면, 선의를 가진 의사나 병원이 환자를 대신해서 환자에게 이롭도록 판단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리병원은 필연적으로 의사나 병원이 환자와 맺는 관계를 바꾼다. 선의를 가진 환자 대행인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주체가 영리병원의 본질이다. 이 때 환자는 시장에서의 한 쪽 거래 당사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환자의 상태는 여전히 불리한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결국 영리병원은 환자의 불리함에 기초해서 이익을 추구한다. 공정성의 측면에서 영리병원이 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리병원은 샌델이 말하는 ‘가치’의 측면에서도 도덕적이지 못하다. 병의 치료와 건강 회복에 돈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우애와 친밀이라는 인간적 가치를 빼고 ‘돌봄’을 생각하기 어렵다. 영리병원은 치료와 건강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상업화한다. 
 
환자의 불리함을 기초로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영리병원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리병원이 만에 하나 어떤 이점이 있다 하더라도 반대한다.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그럴 리는 없지만) 가령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 하더라도 찬성할 수 없다. 병원과 의료의 본질로 보자면, 앞에서 말한 공정성과 가치의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책의 도덕적 기초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영리병원은 근본부터 부실하다. 진료비 증가나 외화 벌이, 서비스의 질과 같은 효과를 따지는 것조차 삶의 본질을 비켜 변죽만 울리는 것이다. 
 
영리병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개인적 삶과 사회적 조직의 기본 원리 한 가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돈이 제일인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 질문은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없고, 또 사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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