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담배규제기본협약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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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좋아하는 ‘글로벌’ 시대지만, 국내외 격차가 너무 커서 당황스러운 때가 있다. 바로 이번 주, 12일부터 17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담배규제기본협약 당사국 총회가 그렇다. 
 
‘담배규제기본협약’이라는 낯선 국제법은 세계보건기구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국제협약으로, 2005년 2월부터 발효되었다. 이름 그대로 금연을 목적으로 하는데, 한국도 2005년 4월에 비준한 후 ‘당사국’이 되었다. 
 
보건분야에서는 최초의 국제협약이지만,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각 나라의 국내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기본적인 규제이긴 하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계 정부’의 가능성을 꿈꾸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그러니 이번 5차 당사국 총회는, 적어도 건강과 보건 분야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국제 행사라 할 만하다.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장관급 고위관료, 수많은 전문가, 시민사회 지도자가 참석할 예정이다. 참가 국가 수만 하더라도 176개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세계적 중요성이나 관심에 비하면 국내의 관심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주최국이지만, 일부러 무관심을 유도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전용 홈페이지(바로가기)만 하더라도 세계적 행사라 하기에는 민망하다. 
 
<FCTC 제 5차 당사국 총회 누리집 첫화면>
사실 그동안 전문가와 시민단체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저런 말이 꽤 있었다. 언뜻 보기에 소극적이기까지 한 정부의 태도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명박 정부의 퇴행적 금연정책이 여기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나아가 보건정책의 전반적인 취약성을 읽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명박 정부의 금연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예산도 사업도 마지못해 하고 있는 분위기가 역력하다는 불만이 많다. 정부 예산이 줄어든 것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지난 10월 국회 양승조 의원실이 낸 보도자료를 보자. 2012년 금연예산은 228억원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2008년 예산에 비해 26.5%나 줄어들었다. 어디 예산뿐인가, 다른 사업이나 정책도 비슷하다.   
 
금연에 가장 효과가 크다는 담뱃값 인상은 물론이고, 금연광고 등의 비가격 정책도 지지부진하다. 담배규제기본협약에 들어 있는 실내 금연도 여전히 소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하노라고 한다는 반론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실내금연이다. 다음달 8일부터 연면적 150 제곱미터 이상의 술집과 식당, 커피집이 금연 시설이 되었다. 너나 없는 심한 반발 속에 이 정도라도 어디냐는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 시설이 대부분인 현실에서는 그저 ‘상징적’ 조치일 뿐이라는 냉소가 더 크게 들린다. 이마저 이번 당사국 총회를 의식해서 부랴부랴 시행한 조치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꽤 많다.
 
금연정책이 지체, 정체되면서 흡연율은 제 자리 걸음이다. 오히려 악화된 면도 있다. 대표적으로, 2007년 45.0%까지 떨어졌던 성인 남성 흡연율은 2010년 48.3%로 다시 올랐다. 
 
처음 담배를 시작하는 나이가 평균 12.7세로 낮아졌고, 중고등학생의 흡연율은 12%를 넘는다. 공원과 도로에서 금연구역을 확대한다고 요란했지만, 실상은 여전히 ‘흡연대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의 금연정책이 소극적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 의심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소극적 금연정책이 실무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큰 구조적 요인이 공중보건 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관료적 행정관리의 특성상 실무 차원에서 금연정책을 의도적으로 지체시키기는 어렵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정책과제이고 한국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하기 때문이다. OECD 국가 중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우리의 흡연율이 정책 실무자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지 않을 리 없다.  
 
따라서 금연 정책의 방향과 기조에는 정책 실무가 아니라 ‘정치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유력한 후보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내걸었던 “비지니스 프렌들리”가 바로 그것이다. 
 
짐작하다시피,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단순히 산업과 경제정책이 아니다. 공익과 사익이 충돌할 때, 또는 건강과 영리가 긴장관계에 있을 때, 시장과 영리 쪽 손을 들어주겠다는 정치적 지향이자 선언이다. 이 정부의 이념적 기초이기도 하다. 
 
이런 정치적 지향이 정책으로 현실화되는 대표적 전환과정이 바로 규제완화이다. 취임하면서 ‘전봇대 뽑기’를 대표적 상품인양 내세웠지만, 그것은 이 정부의 이념적 기반을 나타내는 지극히 상징적 행위였다.  
 
모든 사람의 건강을 다루는 보건정책조차 규제완화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이는 역사적 과거이자 현재도 진행 중인 정치, 경제적 개입의 방식이다. 이러한 규제완화가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은 얼마 전에 이미 자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다(프레시안  서리풀 논평).
 
이런 이유 때문에 금연을 위한 많은 규제는 좌절로 끝나기 쉽다. 개인의 흡연권이나 서민의 부담과 충돌한다는 것은 피상적 이유일 뿐이다. 사회적 통제에서 벗어난 더 자유로운 시장, 나아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사회적 통제와의 긴장관계 속에서 보건정책의 지체와 좌절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불평등 때문이다. 흡연이 계층에 따라 불평등하게 나타나는 습관이자 행동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건강 피해 역시 계층과 계급을 뚜렷하게 차별한다. 
 
전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중) 보건정책은 그나마 위험과 피해의 불평등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물론 섬세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효과가 생긴다. 불평등에 민감한 정책을 통해 서민과 저소득층, 취약계층에게 불리한 조건을 일부라도 개선할 수 있다. 
 
개인과 구매력에 기초한 정책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각자 알아서 금연치료를 받는다면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상담이든 약물치료든 더욱 뚜렷한 불평등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얼마 전 발표된 서울시 자치구들의 흡연 불평등도 이 문제의 ‘사회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흡연을 줄이기 위해서는 집단적,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금연을 목표로 하는 보건정책은 달리 보면 사회정책이기도 하다. 담배규제기본협약에 담긴 정책과제는 대부분 이런 성격을 가진 것들이다.   
 
담배규제기본협약이 한국 사회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정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이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지향과 갈등을 빚는 것도 필연적이다. 그러나 사회, 경제적 권력을 역전시키지 않고는 국제적 협약조차도 무용지물에 그친다.   
 
세계대회가 열리는 중에도 담배규제기본협약은 한국 사회의 큰 관심사가 되지 못할 것 같다. 이는 한국의 금연정책이 보건정책이자 사회정책으로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정이 그렇게 된 데에는 규제완화와 시장이라는 이 정부의 정책기조가 한 몫 했다는 것을 이미 지적했다. 따라서 이런 기조를 수정하지 않고는 작게 보이는 금연정책조차 제대로 해 내기 어렵다.  
 
새 정부 출범이 3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금연정책의 현재 상황을 보더라도 교훈은 분명하다. 건강과 안전을 시장에 맡길 수 없다는 철학을 가진 정부라야 금연정책도 제대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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