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위험의 외주화는 책임의 외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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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고 김용균씨 사망 사고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앞에서도 기자회견과 연좌 농성이 벌어졌다. 왜 불길이 이렇게 번지는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핵심은 행동이나 낙관하기 어렵다. ‘국가’는 몇 년씩 시간을 끌다가 더 심한, 좀 더 참혹한 사고가 나야 마치 처음이라는 듯 굼뜨게 움직인다. 익숙하다. 대안을 내놔야 할 ‘국가기구’들은 지금을 모면하는 핑계를 대기에 바쁘다.

 

기업과 자본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나, 당장 역할을 해야 하는 행정부라고 크게 나을 것도 없다. 그나마 고용노동부가 좀 더 적극적인 것은 관료체제의 관성에 따른 결과일 뿐, 경제 부처를 포함한 권력관계는 압도적으로 ‘경제’를 대변한다. 예를 들어, 지금 국회에 묶여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도 지난 10월 말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사업주에 대한 처벌 하한선이 빠지고 위험작업 예외조항이 신설되었다(기사 바로가기).

 

 

국회는 예상대로(!) 시간 끌기에 돌입했다. 분위기 때문에 에둘러 말하지만, 어떤 ‘정치세력’은 잘못된 것을 고치지 말거나 고치더라도 시늉만 내겠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국회는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를 꼭 그대로 반영하니 놀랄 일도 아니다. 숫자로 표시되는 하청-재하청 업체와 비정규 노동자는 그림자 또는 ‘유령’ 노릇을 면하지 못한다.

 

‘탈(脫) 계급’을 주장하면서 국가를 운운하는 것이 한국판 계급 정치의 특징이다. 늘 그렇듯 이들은 나라, 법률, 시장, 경제, 경쟁력 등 탈계급에 성공하여 겉으로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용어를 동원한다.

 

이장우 의원은 환노위 소위 회의에서 “정부의 전부 개정안을 많이 검토했는데 굉장한 과잉 입법이고 개념이 아주 모호하다”며 “국가경쟁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주52시간제 강행 등으로 고용 시장이 완전히 엉망이고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이렇게 하다가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며 “정부가 낸 산안법 (전부) 개정안을 도저히 심의할 수 없다”고 했다. (기사 바로가기)

 

여기까지는 비관적이지만 축적의 역사가 아주 공허하지는 않다. 한 젊은이의 죽음이 불평등한 권력관례를 흔들면서 아주 작은 기회의 창을 열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위험과 죽음의 외주화를 이해하게 되었고, 여론은 어떻게든 외주화를 막고 줄여야 한다는 데 이르렀다.

 

그 결과, 지금 전쟁터는 바로 외주와 외주화다. 기업과 사업주가 외주를 놓지 않으려는 것은 일차로 경제적 이익 때문이다. 어떻게든 범위를 좁히고 더 많은 예외를 요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좀 더 안전한 노동을 반대하는 모든 정치는 필연적으로 이 경제의 이해관계에 의존한다.

 

경제적 이익은 힘이 세다. 국회에서 법을 다루기 전에 이미 이런 이해관계(언론은 흔히 ‘재계의 반발’이라고 표현한다)는 상당 부분 관철되어, 개정안은 벌써 ‘누더기’ 상태다. 국회를 그대로 통과하면, 안타까운 몸의 증언, 김용균씨의 죽음조차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개정안은 납이나 수은 등 유해한 중금속을 사용하는 업무만 하도급을 금지했는데, 그가 일했던 업종인 수리·정비는 하도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체로 넓히면 더 공허하다. 산업안전보건의 경험이라는 것이 원청의 매뉴얼에는 온갖 금지와 규정이 있어도 하청, 재하청의 현장은 꿈쩍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조선소(자료 바로가기). 그조차 최소한이면, 위험의 외주화는 조금도 달라지기 어렵다.

 

외주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이유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실, 다른 한 가지 이유인 정치적 이유가 경제적 이익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 정치란 다름 아닌 책임 떠넘기기의 정치로, 흔히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또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형식으로 표출된다.

 

정치적 책임 떠넘기기, 나아가 그 책임의 외주화는(책임을 좀 더 학술적인 용어인 ‘책무성’이라 바꿔도 마찬가지다), 일차로 법률적, 제도적 책임에 대한 것이다. 누가 처벌을 받을 것인가 또는 배상은 누가 해야 하나 등이 이에 속한다. 처벌과 배상, 보상의 책임을 미룰 수 있으면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니, 책임 회피는 정확하게는 정치경제적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 해야 한다.

 

나아가 책임의 외주화는 관련자와 사회 전반의 인식과 규범을 바꾸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공공부문의 외주화(민간 위탁 등)는 공공과 민간에 대한 인식과 규범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지방정부가 쓰레기 처리를 민간업체에 위탁하고 이 제도가 성숙하면, 주민들이 인식하는 쓰레기 처리의 책임(책무성)은 정부로부터 업체로 이동한다.

 

불만과 민원은 민간업체로 향하고, 잘하고 못한 것을 업체에 따지게 된다. 정부는 다음에(!) 더 나은 민간업체를 선정하겠다는 것으로 책임을 피하고 뒤로 숨을 수 있다. 책임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정부와 민간업체 각각에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 달라진다. 미국의 법학자인 버커일(Paul R. Verkuil)은 이런 과정을 ‘주권의 외주화’라고 불렀다(도서 정보 바로가기).

인식과 권력까지 외주화하면 원청은 위험, 사고, 죽음의 법률적, 제도적 책임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하청은 위험을 재하청으로 넘기면서 책임도 같이 넘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책임의 외주화가 끝내 닿는 곳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다.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은 여전히 괜찮은 공기업으로 남고, 이들은 모든 면에서 ‘안전’하다.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 지에스(GS) 건설도 이런 방법으로 정치적 책임을 외주화한다. “문제는 하청과 재하청, 하도급”이라는 책임 회피의 정치. 하청과 재하청까지 포함하면 “결국 각자가 책임질 문제”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정치.

 

(정치적) 책임의 외주화라는 틀로 김용균의 죽음 이후를 가늠해볼 수 있다. 기업과 자본은, 다른 것은 몰라도, 책임의 외주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외주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피하려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경제적 이익보다 정치적 이익이 더 중요하다.

 

저항도 이 길을 따른다. 앞으로 참혹하게 죽고 다치지 않으려면, 모든 것에 앞서 책임 떠넘기기를 막아야 한다.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방법은 책임의 외주화를 막는 것과 완전하게 같으므로, 법과 제도 개선의 원칙은 단순하고 선명하다.

 

어떤 경우에도 안전과 건강관리 책임은 백 퍼센트 원청에 부여하는 것. 지난주 주장한 ‘기업살인법’ 제정도 같은 취지다(지난 논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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