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지났지만 대통령 선거의 영향이 여전하다.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사람마다 확연하게 다르다. 편향인지는 모르지만 좌절과 허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훨씬 많아 보인다.
이런 저런 평가와 ‘후견지명(後見之明)’식의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마음이 분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게다가 새로운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우선은 앞날을 경계하는 일이 먼저다. 누가 당선되든 당부와 경계가 빠지지 않았겠으나, 보수를 자칭하는 정치세력이 다시 집권했으므로 경계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건강만 놓고 보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5년 건강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경험으로 볼 때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더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런 걱정을 담아 간절하게 바란다. 선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론이 드러났지만, 서민이 치료비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선거과정에서 약속한 것만이라도 제대로 지켰으면 한다.
또, 생계와 노동이 건강과 생명을 해치는 일이 줄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도 존엄성과 위엄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데에 토를 달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경제를 핑계로 힘없는 사람들의 건강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당부와 경계가 섞여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대부분이다. 새로운 정부가 이명박 정부와 많이 다를 것 같지 않아서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 영리병원과 민영화 문제, 의료급여, 산업화 정책 같은 것들이 가늠자가 될 것이다.
벌써 판단하긴 이르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비슷한 길을 가지 않을까 싶다. 집권층의 정치적 기반이나 그 주위에 모인 정치세력으로 보아 크게 틀린 짐작은 아니리라. 그간 내놓은 공약을 보더라도 판단은 마찬가지다.
건강보다 돈을 더 앞세운다면, 더구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더 피폐하고 고통스럽게 한다면, 앞으로도 비판과 싸움은 멈출 수 없는 과제가 된다. 굳이 따지자면 이런 대결은 누가 집권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정 정부나 정파가 아니라 ‘가치’가 판단 기준이어서다.
누가 새 대통령인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다시 다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혹 깊이 실망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종말론적 미래가 아니라, 조금씩 나아가고 때로는 우여곡절을 겪는, 그런 진보가 현실이다.
대통령 선거로만 봐도 새로운 준비가 더 중요하다. 51.6%와 48%의 구도는 어느 한 쪽으로 완전하게 기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유효기간은 매우 짧을 것이다. 누가 얼마나 준비하는가에 따라 새로운 균형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좀 더 크게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 모든 진보적 가치가 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제도정치로 수렴되는 듯 말하는 것이 공공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사회와 건강의 조건은 제도정치의 틀을 훨씬 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지금 근본적인 기회가 – 또한 위험이기도 한 것은 물론이다 – 있다고 말해야 하겠다. 현재의 제도정치와 투표 행위가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가치’를 반영하기에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 서로 다른 세대, 그 어느 쪽으로 표현하든 표출된 정치적 의사는 아주 부분적인 가치만 반영한다. 건강과 연관된 가치로 치자면 그 틈새가 더욱 넓다.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제도화된 정치와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더 좋은 정치일수록 가치를 더 잘 반영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더 나은 제도정치가 가치를 꽃피우는 기반이 되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정치가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제도 안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행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이상적으로 보면, 선거는 서로 다른 가치가 경쟁하면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이번 대선은 가치의 경쟁으로 보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성공과 실패가 갖는 의미는 제한적이다.
대북정책과 경제민주화 등 몇 가지는 차이를 드러냈지만 아직도 정치세력을 가르는 가치의 차이는 불분명하다. 비전과 지향으로서의 가치가 보잘 것 없어진 데에는 진보 정당의 몰락도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제 기회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가치를 중심으로 경쟁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정치가 가치를 더 잘 반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향하는 가치가 더 분명해지고 사회화, 조직화되어야 한다. 이는 가치의 ‘물적’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건강과 보건의료는 더 하다. 특히 선거과정에서는 그 차이가 더 줄어들었다. 복지 의제가 선거에서 수렴된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가 사회화, 정치화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새로운 기회는 두 가지 의미에서 가치의 토대를 구축할 때 열린다. 한 가지는 가치 자체를 튼튼하게 세우는 일이다. 어떤 정치공동체인가 하는 데서 출발해서 어떤 모습의 건강과 보건의료를 꿈꾸는지가 가치를 구성하는 핵심 내용일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가 그냥 노동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듯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단지 보험 재정의 규모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다. 건강과 의료의 가치가 무엇이고 공동체의 삶이 다른 이의 고통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더 많이 공부하고 꿈꾸며 같이 토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도 더 개방적이고 근본적이어야 한다.
그런 가치를 사회화, 정치화하는 것이 두 번째 토대이다. 가치를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 끌어내어 구체적인 사회적 실체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실천이자 넓은 의미의 정치적 행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예를 들자면, 사회적 연대로 개인의 불운(큰 병 때문에 생긴 비용 부담)에 대처해야 한다는 가치는 마냥 개인의 소망에 머물러서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지역공동체가 노력하는 방식이든 국가에 요구하는 것이든, 사회화, 정치화된 실천 과정을 거쳐야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된다.
사회적 실체가 만들어지려면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이 만나고 네트워크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것도 더 실험적이고 발랄해야 한다.
이런 토대 위에 현실의 정치는 비로소 더 충실하게 가치를 반영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정치와 정부도 달라진다. 다른 것이 아니라 가치에 따라 정권이 교체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토대라고 해서 모든 가능성을 아주 먼 미래로 미루어 놓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아픔은 장밋빛 먼 미래로 보상 받을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 매일 나아가는 발걸음을 통해 미래가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가치의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이 꼭 나쁜 조건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기회의 공간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현실의 틀을 넘어 더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새로운 희망을 품을 만하다.
마침 곧 새해를 맞는다. 이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허무와 무력감을 이기고 되살아나는 꿈을 좇는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