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만성질환, 사회 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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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만 가구가 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세금을 빼내거나 재산을 처분했다. 13만 가구는 치료비를 충당하느라 빚이 늘어났다. 며칠 전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의 정책자료에 나온 내용이다. 
 
한국의 건강보장체계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수치다. 4대 중증질환을 가지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문제는 더 근본에 있다. ‘퍼주기’ 식 복지에 ‘도덕적 해이’를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이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질병이, 또한 그로 인한 치료비가 가난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소리가 아니다. 한국뿐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다. 또한 가난 구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였다. 그렇다면 가난을 낳은 중요한 원인인 질병에 대처하는 건강보장은 아울러 빈곤 대책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질병과 빈곤의 상관관계는 아주 생소하지는 않다. 한국 사회의 인식 수준이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인과관계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이번 자료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사실 한 가지를 보탰다. 돈이 크게 들어가는 병 가운데 암이나 중풍과 같은 중병의 비중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흔한 짐작과 조금 어긋난다. 짐작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중요하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4대 중증질환의 치료비 걱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심각한 치료비 지출의 원인이 딴 데 있다면? 
 
전체 소득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10% 이상인 가구가 문제다. 왜 하필 10%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소득 중 의료비 지출이 이 정도라면 생활이 안정될 리 없다. 
 
그런 가구 100가구가 있다고 칠 때 위암이 1.2%인 데 비해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차지하는 비율은 32.2%나 된다. 치료비 때문에 심한 곤란을 겪는 가구 셋 중 하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심각하게 아는 병, 예를 들어 중풍과 뇌혈관질환은 100가구의 3.7%, 대장과 직장암은 1.3%, 유방암은 1.2%, 만성 신부전은 1%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여다보면 집안이 거덜 나는 불행이요 부담인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엇이 더 크고 급한 문제인가 하는 우선순위를 따져야 하면 달라진다. 
 
물론, 이런 수치를 읽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이번 경우는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의 절대수가 워낙 많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한 가지 질병만 놓고 따지면 중한 병이 경제적 부담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즉, 암이나 중풍 쪽이 전세금을 헐거나 빚을 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지만 수로 보면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가 절대적으로 많다. 결과적으로 경제적 부담이 지나치게 큰 가구 수는 이들 질병 쪽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같은 자료를 보면,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30세 이상 국민의 3분의 1에 이를 정도다.    
 
여기서 건강의 의학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가 갈라진다. 의학적으로는 암이나 중풍이 훨씬 심각하고 중대한 병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질병 하나하나보다 전체 크기에 주목하는 것이 맞다.   
 
따지고 보면, 4대 중증 질환이나 건강보험의 본인 부담이 그토록 문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병이 더 고통스럽다거나 또는 치료가 더 어렵다는 것은 의학적 관점을 반영한다. 그에 비해 치료비가 얼마나 더 들고 가계가 더 기운다는 것은 사회적(또는 경제적) 눈으로 질병을 본 것이다.  
 
만성질환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중풍이나 암에 비해 주목과 관심이 덜하다. 우선, 말 뜻 그대로 오래 앓는 병이다. 강도는 약하고 기간은 오래 끄는 만큼 관심이 적은 것을 탓하기 어렵다.   
 
한꺼번에 많은 돈이 드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도 한 가지 특성이다. 중풍이나 암과 비교해 보면 분명하다. 대신, 오랜 기간 꾸준히 비용이 들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사회적, 정치적으로 주목을 덜 받게 된다. 
 
나이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관심이 적은 또 다른 이유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노인이 많아지면서 만성질환이 느는 것 역시 당연한 현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한두 가지 병 없는 노인이 어디 있으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만성질환이 생길 확률은 커진다는 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고령화는 필연적으로 만성질환의 ‘유행’을 불러온다. 그것을 상식으로 생각하는 만큼 그저 평범한 일로 본다는 것이 문제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이번 자료는 새삼 만성질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특히 사회적 관점에서 만성질환이 빈곤화의 중요한 이유라는 것을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문제는 그 다음, 즉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제안한다. 만성질환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종합적인 점검과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의 일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더 폭이 넓고 협동적인 방식, 통합적이고 연계성이 높은 전략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건강보험의 접근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한 가지 과제일 뿐이다. 물론, 앞에서 말한 자료에서 “의료비 급증을 초래할 고혈압, 당뇨병의 적정 관리를 건강보험의 명시적 목표로 반영”하자고 제안한 것은 논의해 볼 가치가 있다.  
 
특히 건강보험의 더 큰 혜택을 받는 질환(예를 들어 4대 중증 질환)과 그렇지 못한 질환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꼭 필요하다. 앓는 병의 종류가 다르다고 가계 파탄과 빈곤의 위험이 달라질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보험은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치료와 치료비는 만성질환의 경과 중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건강보험이 치료와 치료비만을 취급하는 제도에 그친다면, 만성질환은 당연히 이 범위를 훌쩍 넘는다.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이 범위를 확대하더라도, 즉 치료비 지원을 넘어 조기발견과 적정 관리를 목표로 추가하더라도 충분치 않다. 만성질환은 그 이상이다. 치료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기발견과 관리의 수준도 넘는다. 
 
발병 자체를 줄이는 일, 즉 예방을 빼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관리를 이야기해도 병의 발생을 줄이지 못하면 허사다. 예방은 가장 근본적인 전략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만성 질환 예방에는 흡연, 음주, 비만, 운동, 음식 등 아주 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요인들이 다시 여러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가 그런 요소에 속한다. 
 
간단하게(?) 담배를 예로 삼아 보자. 흡연이 고혈압, 당뇨병의 위험요인이라는 것은 정설이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데는 다시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예를 들어 빈곤, 교육, 가족 등)이 기여한다. 이 때문에 흡연율 줄이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또 사회적인지 상상해 보라. 
 
좁은 곳에서 넓은 범위로 확장시켜 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를 거친다. 
 
치료비 -> 치료 -> 의료 -> 보건 -> 건강 -> 사회
 
흡연에서 보듯, 만성질환은 가장 왼쪽에서 출발해서 가장 오른쪽까지 미친다. 따라서 만성질환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틀이 훨씬 더 커지고 넓어져야 한다. 건강보험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물론, 치료와 의료를 넘는 접근이 필요하다. 예방을 비롯한 적극적 건강이라는 관점조차 좁다. 
 
흡연, 음주, 비만, 운동, 음식…. 이런 위험 요인을 줄이는 것, 이것이 만성질환 대책의 근본에 있다. 좁은 뜻의 정책으로만 보더라도 크게 넓어져 사회화 되어야 한다. 만성질환 정책은 노동, 교육, 지역사회, 문화, 산업 등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점에서, 굳이 말하면 사회정책에 가깝다. 
 
만성질환의 ‘유행’이 조만간 사회적 재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그러고도 남는다. 더 늦기 전에 시각과 틀을 바꾸어야 한다. 의료 패러다임을 넘는, 사회화 전략이 시급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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