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중에 북한 의사 세 명이 나이지리아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이니 한국이니 혼선이 있었지만 결국 북한 의사라고 결론이 났다. 나이지리아 역시 인종과 종교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나라다.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런 내부 갈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불행한 일이지만, 사건으로만 치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내전 상황에 있는 국가는 물론이고 치안이 불안한 곳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사고다. 정치와 무관하게 인도적 활동을 하는 사람조차 늘 이런 종류의 위협 속에 있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니, 사고 그 자체보다 피해자가 북한 의사였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속사정이 무엇이든 북한 의사가 먼 아프리카 국가까지 가서 일한다는 것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렇지 않아도 연합뉴스가 발 빠르게 대강의 현황을 보도했다 (2013년 2월 11일). 북한이 이미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의료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고가 발생한 나이지리아에는 2005년부터 의사와 간호사를 파견했다.
에디오피아와 모잠비크에도 의료진을 보냈고 일부는 의료진 교육을 맡고 있다고 한다. 현지 정부와 주민들의 반응이 좋다는 소식도 덧붙였다.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의료인력이 부족한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들이 벌써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북한 안에서도 약품과 물자가 모자라 환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서, 아프리카는 웬 말이고 더더욱 해외원조가 가당키나 한가.
이런 비난은 충분히 있을 법하고 충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외 원조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북한의 행동만 두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한국도 그렇고, 다른 모든 부자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내부 비판이다.
아무리 부자 나라여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부 사람들이 해외원조를 비판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바로 눈앞의 이웃을 도우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시각에서는 북한이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 나라를 도우는 것은 터무니없다. 바로 옆 사람의 굶주림을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사정이 이런대도 외국을 신경 쓰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목적이 있다는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연합뉴스의 분석도 같은 맥락이겠지만 이런 구절로 끝났다. “북한이 아프리카 지원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비동맹외교를 통해 지지를 확산하고 교류 활성화로 경제적으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어디 북한만일까. 해외원조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나라도, 인도주의적 목표를 가장 앞에 내세우는 나라도, 이런 목적을 완전히 피해가지는 못한다.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른바 ‘국익’에 기초한 원조다.
한국도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이제 백 퍼센트 이익을 앞세우는 시절은 지나간 듯 보이지만, 국가 이익은 비할 수 없는 첫 번째 동기다. 자원외교, 시장 개척과 확대, 경제적 가치, 국가 브랜드… 원조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국가 이익에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같다.
자기 이익이 해외원조의 유일한 근거라면 북한을 비난할 어떤 근거도 찾기 어렵다. 어려운 형편에도 먼 아프리카 나라까지 간 것은 스스로의 이익을 판단하고 거기에 맞추어 행동한 결과일 것이다.
몇 천만, 몇 억의 인구가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하는 중국이나 브라질도 이른바 ‘남-남 협력’이라고 해서 원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익만이라면 이들이 자원 확보나 영향력 증대를 위해 해외 원조를 강화하는 것도 현명한 행동이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불편하고 찜찜하다. 아이티에 지진이 났을 때,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진료진을 구성하고 자기 돈을 들여 봉사에 나선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을 국익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국경 없는 의사회나 옥스팜 같은 비정부기구(엔지오)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나라의 주민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도 국익보다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과거에 우리가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다른 나라를 도울 차례라는 논리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보답론’으로 부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대로,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피원조국(수원국)에서 원조국(공여국)으로 바뀐 거의 유일한 나라다. 나이가 든 세대 중에는 아직도 미국에서 원조받은 ‘악수표’ 밀가루나 옥수수 빵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 원조 덕분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다른 나라에 갚아야 한다는 것이 보답론의 핵심 논리다. 상식적으로 크게 틀렸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논리에 근거를 두면 보답할 게 없는 나라는 원조할 필요도 없어진다. 많은 선진국이 그렇다. 다른 곳에서 받은 것이 별반 없는데 도울 의무가 있다고 따질 수는 없다.
한국은 사정이 다르지만, 그나마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들은 비슷한 주고-받기 논리라도 동원할 수 있다. 과거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보답이 아닌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같은 나라는 개발도상국 원조를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보답론과는 짝이 될 ‘보상론’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조차 해당이 되지 않는 나라들도 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나라들이다. 보상도 보답도 할 일이 없는 이들 나라가 가장 적극적으로 다른 개발도상국을 돕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들 나라들이 근거로 하고 있고 동시에 가장 강력한 원조의 논리는 바로 인도주의이다. 여기에서 인도적 지원은 국익, 보답, 보상, 그 무엇도 아닌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다 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그 도덕적 의무는 한 나라의 국경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한다. 그 때문에 개발도상국과 후진국, 그리고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이 바로 해외 원조이다.
해외원조를 뒷받침하는 인도주의의 논리는 아직까지 그리 튼튼하지 못하다. 특히 국익의 논리 앞에서는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이라는 비판을 받기 일쑤다. 제로섬의 국익 경쟁이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이라면, 앞으로도 죄수의 딜레마를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인도주의는 개발도상국과 그 주민을 지원하는 해외 원조(요즘은 흔히 ‘국제 협력’이라고 부른다)의 현실적인 근거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국익, 보답, 보상, 그 무엇에 기초하든 인도주의를 완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다.
나아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삶을 누릴 기본적 ‘권리’를 갖고 이는 공동의 노력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인도주의의 논리를 넘어 모든 이의 기본권이 충족되어야 하고 이는 모든 국가들이 함께 져야 할 의무라는 것이 원조의 진정한 근거이다. 이렇게 될 때 원조가 아니라 국제 ‘협력’이란 말이 의미를 얻게 된다.
2013년 한국의 공적개발원조 예산이 2조원을 넘었다고 한다. 보건 분야 원조는 비중으로 두, 세 번째 속할 정도로 중요하다. 원조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모자라지만, 짧은 기간 안에 원조규모가 많이 늘어난 대표적인 국가에 속한다. 하지만 속도에 비해 ‘왜’와 ‘어떻게’의 기본적인 철학과 지향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전체와 보건 분야 협력 모두 마찬가지다.
기본이 부실한데 결과가 튼실할 리 없다. 국제적 흐름과 달리 유상원조(차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걸 무슨 자랑인 냥 내세우는 무지가 대표적 예다. 온갖 정부 부처가 경쟁적으로 다 나서서 중복과 비효율이 극심한 것도 같은 뿌리에서 생긴 현상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북한이 무슨 원조냐고 비아냥거릴 일이 아니다. 반면교사로 삼아, 가난한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권리,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되새기는 것이 더 급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