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지나간 한 주였다. 하노이 북미회담 탓이 크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흔들기 마련인 삼일절까지 들어있었다. 그사이 야당은 지도체제를 개편했고, 말썽 많은 한유총의 자본가형 ‘파업’은 현재진행형이다. 아, 미세먼지는 이제 사건 축에도 끼이지 못하나?
생전 처음 보는 일이 거의 매일 생기고, 이제 익숙하겠거니 싶어도 또 생소한 사건이 닥친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역동적’이고 변화할 가능성을 내장한 듯 보인다. “다이나믹 코리아!”는 아직 유효한 구호다.
사람들의 반응은 역동적인 동시에 습관적이다. 극적으로 출렁이는 것은 한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음 관심으로 옮겨가고, 세상을 바꿀듯한 여론도 금방 동력을 잃는다. 나, 자아, 주체, 그 무엇이라 부르든 속도와 시간에 적응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북미회담도, 삼일절과 일본 문제도, 야당과 수구적 정치 행태도, 또한 유치원 파업도, 지나가리라. 다른 문제가 닥쳐 지금 문제를 치우고 몰아내는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의 관심도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가 새로움에 열정을 다할 것이 틀림없다. 겉으로만 역동적이지, 사실은 ‘홈 파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이 새 학기를 시작하는 때라 역사적 사건과 ‘시간’을 더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적 삶과의 관계. 마침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 한 가지. 이런 일은 어떻게 될까 묻는 사이 ‘현재’는 벌써 지나간 듯 보이는 좋은 예라 생각한다.
“통계청이 27일 발표한 ‘2018년 출생ㆍ사망통계 잠정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전년(35만7,800명)보다 8.6% 감소한 32만 6,900명이었다. 이는 1970년부터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최저치이자 30년 전(1988년 63만명)의 반토막 수준이다. 우리나라 출생아 수는 2002~2016년 사이 15년 가까이 40만명대를 유지했지만 2017년 처음 30만명대로 낮아진 이후 2년 연속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합계출산율(0.98명)은 역대 최저였던 전년(1.05명)보다 더 낮아졌다.”(기사 바로가기)
당연히, 처음 듣는 소식이 아니다. 아주 가깝게는 지난해 말부터, 멀리는 십수년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사태인, 오히려 피로감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또 그 소리”, 동어반복, 공허한 처방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저출산과 고령화 그 자체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날이 지나가는 우리의 고통과 삶의 과제가 이 ‘구조’ 변화와 무관하지 않으니 그냥 가만히 있기 어렵다. 인구 변화는 과거의 결과이면서, 미래의 조건이자 원인이다. 그것도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예를 들어, 유치원 교육의 공공성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조건은 곧 바뀐다. 유치원 입학 대상인 만 3~5세 유아 수는 2018년 135만 명에서, 2021년 112만 명으로, 2025년에는 103만 명으로 줄어든다(기사 바로가기). 2025년이면 아주 먼 미래도 아니다. 정부와 민간은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소신 수준의 공방에 근거 없는 말만 무성한 소득 불평등은 또 어떤가? 우리는 한 주전 <논평>에서 이렇게 지적했다(서리풀논평, 프레시안, 라포르시안).
“우리 사회에 이만큼 노인이 많았던 적이 없고, 노인 인구 비율이 높았던 적이 없다. 가난한 노인도 단군 이래 가장 많다. 1954년 출생자가 55만 명가량, 1959년 출생자가 80만 명가량인데, 노인의 상대빈곤율은 47%가 넘는다…. 인구 피라미드 그림은 지금 만 60세부터 만 50세까지가 가장 두껍다. 10년, 15년 안에 이들은 노인이 되고, 빈곤율이 그대로면 절반 정도가 통계의 소득 1분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구구조는 익숙한 한 가지 예일 뿐, 오늘 문제로 삼는 것은 바로 ‘미래’이다. 삶의 조건과 맥락, 본질에 관여하는 문제로, 통일은 어떻게 하고, 건강보험 재정은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가? 공항을 짓는다고 ‘지방’을 살릴 수 있을 것이며, ‘○○형 일자리’를 만든다고 지역의 미래가 보장될까? 정부는, 경제부처는, 무엇보다 ‘국정’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먼 훗날 닥칠 수치와 지표가 중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값있고 행복하게 살 조건이 무너지는 상황이 우리의 관심이다. ‘미래’라는 말도 오해하지 마시라. 예를 들어, 미래사회의 구성원은 툭하면 동원되는 그 ‘미래 세대’가 아니다. 5년 뒤, 10년 뒤, 30년 뒤가 그리 먼가, 미래 세대는 ‘그들’만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 세대이기도 하다.
현재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은 구닥다리 격언 같지만, 그 모든 것을 흔들 변화가 진행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미래에 개입하는 현재가 말할 수 없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단기주의(short-termism)’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현실.
노인 빈곤, 불평등 심화, 지방 붕괴와 소멸을 뻔히 예측하면서도, 경제와 삶을 둘러싼 구조 개혁은 말도 꺼내지 못한다. 청와대, 행정부, 경제 부처에겐 당장 다음 분기 소득과 일자리 지표를 개선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저출산이 어떻고 고령화가 어떻고 하지만, 대기업은 콧방귀만 낄 뿐이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 형편에…”
단기주의는 일차적으로는 정치적 무책임, 이차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불러온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와 정치의 사활적 이해관계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것도 정치적 현재에 있다. 여론, 지지율, 다음 선거, 다음 정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경제 주체는 더구나 각자도생, ‘공동체’는 시장을 벗어나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당장 살아야 하고 커지지 않으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구호와 다짐, 윤리로는 현재를 이길 수 없다. 누구나 자영업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당사자에게 개혁은 고통일 뿐이다.
정치와 경제 모두, 자기 이해관계에 충실하다는 뜻에서 합리적으로 움직이며, 바로 ‘시장’이 그 바탕과 틀로 작동한다. 정치와 경제가 시장 메커니즘에 충실할수록, 단기주의, 정치적 무책임, 개인주의는 ‘자연’의 질서이며 ‘합리성’이다. 구조이고 법칙이면, 개인이 어때야 한다는 해법은 소박한 구호를 벗어나기 어렵다.
힘에 부치지만, 아직 사람을 위한 정치가 남아 있다. 우리는 정치적 주체가 유일하게 이 질서에 새로운 틈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적 질서를 흔들고 재편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고유한 역할이라는 추가 설명은 중언부언에 가깝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국가권력이 핵심적인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사회경제체제를 전환하는 일에 어떤 다른 대안이 있는가. 지금을 두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정 기조를 바꾸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으로 전환하기 바란다. ‘지금이라도’가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그래야 한다.
예를 들어, 공공 일자리를 크게 늘릴 수 있을까? 소득 불평등과 일자리 축소에 대한 미래 대안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검토하는 것은 어떤가? 소멸 위기를 맞아 시장이 무너지기에 이른 곳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포괄적 ‘공영’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면?
현실을 탓하며, 현재가 미래에 개입하게 두지 말라. 단기주의를 벗어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것, 미래가 현재에 개입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와 정치세력의 과제이자 능력이다. 정치의 소명이며, 마땅히 감당해야 할 도덕적 의무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