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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경제의 불확실성, 당장의 생명을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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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

 

 

오랜 기간 불황이 이어졌던 조선업계가 회복세에 들어섰다. 작년에 한국의 선박 수주량은 중국을 제치고 선두를 차지했으며, 국내 조선사들이 건조하는 LNG 선박의 가격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관련 기사: 韓, 2월 수주량 1위 … LNG선 가격 ‘상승세’). 그러나 요즘 거제시의 조선업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은 걱정이 많다. 올해 1월부터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을 현대중공업에 매각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니 급기야 지난 3월 8일 계약이 체결됐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대우조선해양 매각 본 계약 … 노조, “실사 저지 하겠다”). 산업은행과 현대중공업은 대우조선의 자율경영체제 유지, 근로자의 고용안정, 협력업체와 부품업체의 기존 거래선 유지 등을 골자로 하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생산성이 유지되는 한’, ‘대외경쟁력이 있는’이라는 단서조항이 붙어있는 그 약속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대규모 구조조정과 이로 인한 지역 경제침체의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바로 눈앞에 닥친 경제 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주로 고용과 생계 문제를 걱정하지 건강 문제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급한 불 앞에서 ‘건강 이야기’는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침체와 실업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최근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에 발표된 영국 킹스칼리지와 미국 하버드 대학 공동 연구팀의 논문은 지금 당장 직장을 잃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경제위기 상황에서 건강과 생명을 염려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논문 바로가기: 경제적 불확실성과 자살의 단기적 연관성).

 

연구의 요지는 경제적 불확실성의 단기적 변동이 자살의 증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영국의 일 단위 경제정책 불확실성 지수(daily economic policy uncertainty index)와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일별 자살 자료를 이용하여 연관성을 분석했다. 일 단위 경제정책 불확실성 지수는 영국의 650개가 넘는 신문에서 경제 관련 단어들, 불확실성과 관련된 단어들, 그리고 지출, 적자, 세금 등의 단어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기사의 숫자를 기반으로 구성한 것이다(☞관련 사이트: EPU index). 분석결과, 일 단위 경제정책 불확실성 지수가 1% 증가하면 같은 날 자살이 0.00049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치가 매우 작아 보이지만, 지수의 변동 폭이 커서 많게는 500% 이상인 경우도 있음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이러한 상관성은 당일뿐 아니라 다음 날도 비슷하게 나타났는데, 이틀이 지나면 경제정책 불확실성 지수와 자살의 관련성은 더 이상 관찰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자살이 많으며, 경제적 불확실성이 자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촉발 요인으로 작동한다고 해석했다. 충동적인 자살이 많다면 충동이 생길 때 자살 수단의 접근성을 떨어뜨리면 자살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논문은 한국에서 맹독성 살충제 규제가 이와 관련한 음독자살을 감소시킨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아질 때 자살 예방 캠페인이나 활동 등을 집중적으로 배치하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제언했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조선업에 의존도가 높은 거제시는 조선업 침체와 더불어 지역 전체의 경기 침체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거제시는 작년 하반기에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관련 기사: 지난해 하반기 경남 거제시 실업률 7.1%…또 역대 최고). 선박 수주량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효과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이제 최악의 상황이 지나갔다고 한숨 돌리던 참에 또 다른 경제적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논문이 보여주듯 이러한 상황은 자살 혹은 다른 건강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선박 수주가 급감하고 힘들었던 2016년, 그 전해 10만 명당 21.1명으로 전국 평균(26.5명)을 밑돌던 거제시의 자살률은 35.3명으로 치솟았었다. 지역경제의 위기가 건강의 위기로 나타난 것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문구는 단지 문학적 메타포가 아니라 현실을 나타내는 사실주의 언어인 셈이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일자리 문제 뿐 아니라 건강 측면에서의 정책적 관심이 필요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방지하고 상생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주민들의 생명과 건강, 삶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지방정부와 지역 의회는 기업에 대한 지원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경제적 불확실성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다양한 불안정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 건강이 이미 안 좋은 이들, 잘 드러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이들의 삶과 건강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한다.

 

 

* 서지정보

Vandoros, S., Avendano, M., & Kawachi, I. (2019). The association between economic uncertainty and suicide in the short-run. Social Science and Medicine, 220(October 2018), 403–410. https://doi.org/10.1016/j.socscimed.2018.11.035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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