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공공의 ‘신뢰회복 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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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대로면 2060년에는 국민연금이 고갈된다고 한다. 정부가 이 정도로 먼 훗날을 예상하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31년 후에는 적자가 된다는 소리가 보태지니 큰 일 나는가 걱정스럽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먼 훗날까지 예측하고 정책을 논의했는가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솔직히 말해 통계적으로 맞는 예측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바로 며칠 전 한 신문이 보도한 내용이 그런 의심을 뒷받침한다. 통계청이 2년 만에 인구감소 시점을 2018년에서 2030년으로 정정했다는 것이다. 
 
인구통계가 이 정도라면 연금 예측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부실한 연금 계산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꾸 적자와 고갈을 강조하는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한 가지 더, 연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다름 아니라 공기업을 비롯한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가 곧 시작된다. 겉보기에는 민간이 하는 형식이지만, 결국 기획재정부가 주관해서 111개 공공기관을 평가한다. 정권이 바뀐 올해는 기관장 평가에 참고하겠다니 더 살벌하게 생겼다.
 
작년까지도 평가를 했고 해 마다 결과를 발표했다. 그 때마다 ‘경영 부실’, ‘방만 경영’, ‘혈세 물 새듯’ 과 같은 부정적 표현이 언론을 도배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어찌 보면 정부가 평가를 활용해서 일부러 국민들의 분노를 돋우는 것 같기도 하다. 제발 괜한 의심이길 바란다.
 
다른 사례 하나를 더 보탠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속철도 민영화 문제. 도무지 이해하지 못 할 일이 있다. 감독관청인 국토부가 고속철도가 곧 사단이 날 것처럼 흠집을 내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사고가 끊이지 않는데다 적자까지 심해 운영이 엉망진창이라고 앞장서서 홍보를 하는 중이다. 
 
말 그대로 운영이 엉망이면 감독관청인 국토부 역시 책임이 작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탓하는 모양이긴 하나 반성일 리는 없고 이상한 자아분열처럼 보인다.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는 잘 알겠다. 민영화라고 그랬다가 이제 제2철도공사를 만든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든 현재의 공공체계를 흔들겠다는 의도가 명백하다.          
 
위의 세 가지 사례는 언뜻 보면 별개의 일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일치하는 것이 있다. 어떤 형태로든 공공을 공격하고 부정적 인상을 심는다는 점이 그렇다. 문제의 양상과 그 이유는 다채롭지만 공공이 하는 일은 영 미덥지 못한 것으로 결론난다.  
 
비판과 공격은 공공이 가진 모든 문제점을 망라한다. 비효율과 적자는 보통이고, 툭하면 낙하산에 부정부패의 온상, 혈세 낭비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이 보통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때에는 정권의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공격은 여러 곳에서 온다. 일반 시민이 혈세 낭비나 비효율을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언론과 시민단체가 흔히 하는 일이기도 하다.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정부 스스로 그런 일에 앞장서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외부든 내부든 공격의 결과는 불신으로 이어진다. 아예 공공의 존립 근거는 사라지고, 잘 봐줘야 ‘필요악’ 정도다. 공격과 비판이 쌓일수록 공공은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래저래 공공과 공공기관을 향한 대중의 불신은 한계를 넘은지 오래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1980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노골적으로 연방 정부를 공격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큰 정부와 정부의 개입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넘어 마치 부도덕하고 반국가적인 것처럼 묘사되었다.  
 
공공을 향한 레이건의 공격은 그의 정책기조를 설명하는 도입부였다.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시장에 문제 해결을 맡기는 레이거노믹스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모범 사례처럼 되어 있는 레이거노믹스는 이처럼 공공과 정부를 공격하는 데서 출발했다. 
 
레이건에서 보듯, 공공연하게 공공을 공격하고 이것은 대중의 불신을 재생산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연쇄반응은 명백하게 이념적이다. 당사자들이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공공부문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것은 단지 지엽말단의 기술적 문제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과 유권자가 공공을 혐오하고 반대하는 것은 처음에는 정서적 반응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반감과 분노는 시장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강화하는 토대 노릇을 한다. 반(反)-공공이 자연스럽게 민간, 민영화, 시장을 옹호하는 어떤 하나의 이념체계 또는 ‘주의’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불신을 지렛대로 해서 시장이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국민연금을 믿지 못하면 개인의 저축이나 민간 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국민연금을 폐지하자는 조직적 운동이 생기고, 그 ‘운동’을 민간보험사가 후원한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까지 들린다(미디어오늘 기사, 당사자들은 후원이 아니라 광고비였다고 한다). 노후 소득보장이 시장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공공기관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평가결과가 발표되면 공기관 비판과 함께 늘 비슷한 처방이 뒤따른다. 다름 아니라 민영화다. 공공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민간으로 넘기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속철도 민영화는 더욱 노골적이다. 감독관청이 앞장서서 공공은 문제가 많으니 민간으로 넘겨야 한다는 주장을 전파하고 있다. 영국항공이나 영국철도 같은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밀어붙인 대처 총리가 한국에 오기라도 한 것일까.  
 
공공의료나 공공보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운영이 방만하니, 비효율의 극치니 하지만, 결론은 민간으로 넘기고 시장에 의존하라는 주장으로 끝난다. 진주의료원 폐업의 전체 시나리오도 공공을 공격하는 익숙한 논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예들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공공을 공격하는 것, 나아가 정부 스스로 앞장선 ‘자해’ 행위는 대중과 유권자가 갖는 불신을 더욱 심화시킨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원하든 정부는 자해 행위를 당장 멈추어야 한다. 
 
물론 공공의 문제를 감추고 거짓으로 아름다움을 꾸밀 수는 없다. 운영은 투명해야 하고, 공공의 가치를 충족하는 성과는 커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어떤 시도도 대중의 불신 위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 신뢰 회복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시장의 논리에, 그것도 타락한 시장에 붙잡혀 자해를 일삼는 정부만 쳐다봐서는 성공할 수 없다. 바깥에서 시작하는 압력이 필요하다. 역설적이지만, 제도화된 공공의 바깥에 기반을 둔 ‘사회 권력’이 새로운 공공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정부를 포함해서 공공기관과 공공부문의 거버넌스를 혁신하는 것이 급하다. 우선, 명토 박아 두자. 정권의 전리품에 머물거나 자치단체장의 선거용 소모품이 되어서는 그 무엇도 바꾸기 어렵다. 
 
나아가 거버넌스 혁신은 무슨 고상하고 어려운 말이 아니다. 정책 결정과 시행에 국민과 시민이 제대로 참여하는 것은 기본 전제다. 공공기관의 지배 구조는 민주화되어야 하고, 제도의 구조와 운영은 진짜 참여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잘 모른다? 익숙하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시험하고 시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해치는 자아분열이 아니라,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공공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공이 제대로 작동하고 공공다워지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공공 내-외부가 협력하는 노력이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에 사회 권력의 역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자해에서 신뢰 회복으로, 공공부문 정책의 기조가 완전히 바뀌기를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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