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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연구에서의 환자대중참여, 동원의 대상인가 의사결정의 동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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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조(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인보사 사태는 현재 국내 신약개발역사에 블록버스터급 흑역사를 기록 중이다. 주연은 관리감독의 책임을 맡은 식품의약품안전처, 그리고 제품의 개발과 판매를 맡은 코오롱생명과학이다. 조연은 가짜 성분이 포함된 관절염 유전자 치료제를 진짜로 알고 맞은 환자들이다(관련기사: ’인보사’ 결국 허가취소…뿔난 환자들 줄소송 움직임). 익숙한 풍경이다. 과학 사기의 상투적 시나리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적 과학기술에 대한 열광이 등장하고, 사기의 조짐이 드러난다. 사기의 전말이 밝혀지기 전까지 전문가와 대중의 의견은 여러 갈래로 갈린다. 그래도 효과는 있지 않았냐는, 가짜 성분을 붙들고 애써 긍정하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약회사와 정부의 속임수에 분노를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그러다 과학 사기의 전모가 드러나면 비로소 피해 입은 환자의 존재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위기를 조장하거나(관련기사: 20년간 키워온 바이오 산업 휘청), 더 높은 전문성 강화를 대책으로 제시한다(관련기사: ‘인보사’ 허가 취소, 코오롱 형사 고발… “심사 강화하겠다”).

 

온통 전문가와 정부의 목소리로 채워진 공론의 장에서 환자와 시민의 목소리는 ‘소송’과 ‘분노’라는 단어로만 등장한다. 환자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임상연구의 전 과정에서 환자와 잠재적 환자, 즉 시민의 역할이 이처럼 수동적 위치에, 조연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한국 사회에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았지만, 임상시험에서의 ‘환자대중참여(Patient and Public Involvement: PPI)’는 사실 새로운 개념도 아니고, 교과서에만 적혀있는 그럴싸한 단어도 아니다.

이미 5년 전인 2014년, 국제학술지 <BMJ Open> 에는 영국을 기반으로 임상시험 전 과정에서 환자대중참여의 경험을 연구자와 환자 대중의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이 실린 적이 있다(☞환자대중참여의 계획부터 실행까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영국 국립보건연구소의 의료기술평가 연구비 지원을 받은 연구들 중 무작위대조시험을 수행한 연구 사례들이 분석에 포함되었다. 분석대상 연구 111건 중 연구의향서와 연구제안서에 환자대중참여가 기술되어 있는 과제는 91건 이었다. 논문은 책임연구자와 환자대중 참여자가 인터뷰에 응답한 연구과제 28건을 최종 분석 사례로 포함했다.

분석 결과 임상시험에서 환자대중참여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감시자 유형(Oversight mode)이다. 6개의 연구에서 임상시험운영위원회에 환자대중의 대표가 참여하고 있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연구비 지원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환자대중의 대표를 위원회에 포함시켰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참여했던 환자대중의 대표도 연구자들이 자신을 왜 위원회에 포함시켰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그냥 위원회의 병풍처럼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두 번째는 관리자 유형(Managerial mode)이다. 14개의 연구에서 환자대중이 공동연구자 지위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역할이 있었다. 임상시험 환자들에게 제공할 임상시험 소개설명서, 임상시험 동의서, 서신 혹은 설문 문항 설계에 직접 참여했고, 일부는 연구결과 분석과 해석, 성과확산에도 관여했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연구에 참여했던 연구자와 환자대중은 모두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세번째는 반응형 유형(Responsive mode)이다. 14개의 연구에서 환자대중이 그룹 혹은 패널을 구성하여 연구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기존에 환자대중 대표 한두 명이 위원회에 참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이 경우, 환자대중 그룹은 연구비 지원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임상시험 수행과정에서도 다양한 문제에 대해 연구자들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유형에서는 연구자와 환자대중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의사소통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연구자가 이해하기 힘든 환자의 특성이나 임상시험 참여집단의 관심사를 파악하고 연구의 과정에 반영할 수 있도록 했다.

 

시민의 관점에서 임상시험의 환자대중참여를 상상해 보면 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특별한 지식을 가져야만 참여할 수 있는지, 환자나 환자 가족만 참여하는 건 아닐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길지, 본업에는 지장이 없을지, 괜히 어려운 일 하는 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지, 빼앗긴 시간만큼 수당은 나오는지 등등.

하지만 오늘 소개한 영국의 사례 논문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분명하다. 영국에서는 국가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환자대중참여 방법을 마련해두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제도는 연구자들이 뭐라도 해보게끔 유도했다는 것이다. 실천 과정에서 좌충우돌과 시행착오가 있었고, 실천 유형도 수동적인 참여부터 적극적 관리와 개입까지 그 형태가 다양했지만, 이를 통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임상시험의 필요성과 수행방법을 전문적 지식으로 습득한다. 더러는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인이 누구보다 환자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연구자들은 임상시험 참여자 설명문과 동의서의 문구가 너무 전문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우니 수정하라는 임상윤리위원회의 지적을 받는다.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다. 환자대중의 관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인 것도 아니다. 특정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고 경험했기에 전문가이다. 전문가와 환자대중의 관점, 역할은 다를 수 있으며, 이 둘이 만나는 것은 더 나은 과학적 연구, 더 나은 윤리적 연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황우석 사태는 국내 모든 연구기관에 임상시험윤리위원회를 설치하는 성과를 낳았다. 인보사 사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규제와 심사의 전문성을 강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지원의 모든 연구개발 과정에 환자대중참여의 기전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과학적 측면에서나 윤리적 측면에서나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의미 있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동원의 대상으로서 환자 중심 돌봄이라는 단어를 남발하기보다는 의사결정의 동반자로서 사람 중심 돌봄이라는 실천을 만들어내야 한다. 과연 일반 시민이 그 어려운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이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비전문가인 행정관료에게 계획과 성과를 설명하려는 노력 정도면, 충분히 환자대중과도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시작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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