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모자가 사망하고 나서야 다시 ‘행정’이 요란하다.
“보건복지부는 16일 17개 광역자치단체 복지국장 회의를 개최하고 이번 사건 가구와 유사한 사각지대에 있는 대상자를 발굴·지원하기 위한 긴급 실태조사를 각 광역자치단체에 요청했다. 실태조사 대상은…복지부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관리시스템’을 통해 입수되지 않는 재개발 임대주택 등 저소득층 거주 공동주택 월세, 관리비 장기체납(3개월 이상) 가구에 대해서도 함께 실태조사를 할 예정이다.” (기사 바로가기)
무슨 사건만 생기면 ‘전수조사’를 한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실태조사’라고 부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빅데이터나 인공지능까지 동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다시 전통적 행정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벌써 한참 전에 드러난 한계에서 교훈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정부는 2013년 경북 칠곡과 울산에서 연이어 발생한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자 이듬해 2월 종합대책을 발표했으나, 대책의 핵심인 필수예방접종 미실시 아동과 학령기 미취학 아동에 대한 조사 및 가정방문은 발표 2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기사 바로가기)
시도를 동원해 조사한다고 하니 전수조사라는 유행(?)이 끝난 것 같지는 않다. 이제 통일부가 나설 차례면, 모르긴 해도 무슨 ‘탈북자 평생관리 시스템’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까? 건강보험, 국민연금, 주민등록, 복지, 경찰 정보망 등등 무슨 시스템이 동원될지 알 수 없지만, 또 한 번 완전히 일목요연한 ‘관리체계’를 제안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취업과 빈곤, 출국과 재입북, 심지어 국가정보까지 정부의 책임을 묻는 일이 잦으니,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정보 인프라를 활용해 그런 사람을 바로 알려주면 얼마나 편할까? 물샐 틈 없는 투명하고 촘촘한 관리. 아니 감시. 어찌 보면 가장 안이한 대안이지만, 이 또한 그들의 관료적 이해관계다.
하지만 국가정보 시스템은 흔히 허구이며 좋게 보더라도 과장이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부터 사고를 막는 것까지, 효과와 효용에 무관하게 시스템은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심하면 거꾸로 현실을 지배한다. 흔히 목표와 본질에서 분리되는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필연적이다. 국가나 중앙정부 관료가 요구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운용되려면 시군구청이나 보건소, 무슨 무슨 사무소 같은 일선 행정기관이 뭘 해야 하는지 눈에 선하다. 정보의 바탕이 되는 자료(데이터)는 누가 모으고 입력할 것인가? 얼마나 정확하고 현실적인가? 있는 정보를 활용할 때도 비슷하니, 시스템이란 이런 것이다.
정보를 활용할 때도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누군가를 ‘발굴’하면 그다음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 모두 최일선 행정관리 담당자의 몫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누구? 지표와 통계, 실행, 평가와 보상 등을 둘러싸고 ‘과시’와 ‘책임 떠넘기기’의 정치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국가 하부체계의 반응과 일하는 방식이 시스템에 조응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중앙정부 모든 부처로부터 관리와 감시가 깔때기처럼 모이면 이들이 스스로 어떤 지혜(?)를 발휘할지 뻔하다. 이번에도 지방정부는 사업지침에도 없는 ‘이혼확인서’를 요구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시스템은 일선 담당자를 힘들게 하는 동시에 자유롭게 한다. 예상컨대 나중에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는 피하고 유리한 자료를 선택하는 것이 인지상정. 시스템의 용도에도 이해관계가 걸리긴 마찬가지다. 완벽한 시스템이 아무도 걸러내지 못했으면, 그리고 미리 정해진 규정을 어기지 않았으면 나는 안전하다(!). 모든 책임은 시스템 탓으로 넘어간다.
익숙한 대응의 경로가 이토록 뻔하면, 우리는 기술과 방법보다 체제가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일만 해도 해당 지방정부가 복지 지출에 유난히 엄격하거나 가혹해서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종류만 다를 뿐 모든 지자체(보건소 포함)가 국가적 ‘체제’에 부응하여 나름대로 행정 원리, 관리 기술, 문화, 가치와 규범을 구현하고 실천한 결과가 아닐까?
지금 우리가 굶주림과 죽음을 말하는 조건은 ‘선별’과 ‘잔여’에 기초한 체제 또는 ‘복지 레짐’이다. 이 레짐의 특성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국가와 사회는 그 나머지를 그나마 최소한 수준에서 담당한다는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 사회를 지배하는 각자도생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사고의 근본 원인 또한 이러한 사회적 원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선별과 잔여를 넘어 보편복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대안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에 대한 여러 반론도 이미 차고 넘친다. 정말 문제는 그 내용보다는 사회적 논의와 공론화도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결론이 이미 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여, 아니 그 때문에도 우리는 다시 보편복지 논의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것만 해도 다음 몇 가지 근거를 댈 수 있다. 체계의 사각지대 찾기가 아니라 체계가 전체로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 초점이다.
첫째, 기술과 실무로 보편복지가 불가능하다는 논리는 번지수가 잘못되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바람직한 것’은 현실적 불가능성과 떨어지지 않는다. 당장 이룰 수 없는 데도 그 바람직함을 계속 말하는 이유는 그 지향이 현실을 비판하고 앞으로 끌고 가는 ‘현재형’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체제적 지향은 실용적이기도 하다.
둘째, 기술과 실무에 한정해도 반드시 ‘필요한’ 개인과 사각지대를 찾는 방식이 더 어렵고 비효율적이다. 그런 시스템과 빅데이터 따위의 신화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엄청난 돈과 사람을 동원해 모종의 시스템을 구축할 할 수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과 모든 삶을 모니터링하고 감시할 수는 없다.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번에 탈북자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다음에는? 혼자 살면서 우울한 노인? 가난한 농민? 일시적인 자살 고위험군? 알코올 중독자? 외국인 노동자? 정신장애인? 성인 발달장애? 아동학대는 되었다 치고 보육이나 교육에 소홀한 부모?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자식? 고혈압 관리를 열심히 하지 않는 환자?
셋째, 선별과 사각지대로는 바람직한(또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적 삶의 원리를 회복할 수 없다. 보편복지로도 모든 현실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삶의 고통과 수고는 사람마다 다르고 필요한 외부 지원도 천차만별이다. 주로 국가권력과 정부가 구축할 보편복지 정책과 체계는 최종 해법이 아니다.
사회와 공동체,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공적 시스템의 빈틈을 촘촘하게(!) 메꾸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개인적 삶의 질, 그 존엄성과 품위, 그리고 이에 대한 권리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가치, 문화, 규범, 삶의 원리.
다시 확인한다. 보편복지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복지 대상자라는 범위와 숫자의 원리(행정 원리)라기보다, 모두가 기본적인 생활 수준을 누리고 삶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는 인권의 원리(가치, 윤리, 이념)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삶의 양식과 ‘생활세계’가 녹아들어야 한다.
부양의무자 규정이나 신청주의 같은 행정과 관리 방식을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사고와 필요가 생길 것이 명확하다면, 그만큼 길고 집요하게 유지해야 할 원리를 다지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