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공정성이란? 불평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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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분기에 소득 하위 20%(1분위) 가계의 명목소득 감소가 1년 반 만에 멈췄다. 반면에 소득 상위 20%(5분위)의 소득은 증가세로 전환해 2분기 소득분배지표는 집계가 시작된 2003년 이후 가장 나빠졌다.”(기사 바로가기)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은 계열사들로부터 20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직급이 올라가면서 지난해 상반기(8억3900만원)보다 66.9% 인상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와 SK하이닉스에서 각각 20억원씩 총 40억원을 받았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주사와 계열사로부터 79억3600만원을 수령했다.”(기사 바로가기)

“한국장학재단의 ‘2014∼2016년 대학별 국가장학금 신청 현황’을 토대로 고소득층(9‧10분위) 비율과 국가장학금 미신청자 비율을 반영해 분석한 결과, 스카이 등 상위권 6개 대학의 고소득층 추정 학생 비중이 70% 내외에 이르렀다.” (기사 바로가기)

 

다시 떠오른 ‘공정성’ 또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물음. 누군가는 이 가치를 악용하지만, 발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근본 원리가 저절로 드러난다. 정쟁에만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중대하고 심각한 사회적 과제라는 점도 있다. 이 기회에 공정성과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다시 확인하고자 한다.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무엇이 공정한 것이고 무엇이 공정하지 못한 것인가? 기회란 무엇을 뜻하며, 기회의 평등이란 어떤 의미인가? 귀중한 가치와 희소한 자원은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배분되어야 할까? 불평등은 공정성의 결과인가?

 

첫째, 우리는 ‘능력주의’가 곧 공정이고 정의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땅의 압도적 능력주의, 기껏해야 제도적 시험 결과와 성적에 따라 사회적 직위와 직업, 부와 소득, 권력과 권위가 결정되는 것이 어떻게 정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하게도 시험과 성적은 어떤 형태와 제도로든 온전하게 능력을 드러낼 수 없다. 사람이 가진 모든 능력은커녕 지적 능력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사실이 그게 아니라면 ‘능력대로’를 되뇔 것이 아니라 불법과 부정을 핑계로 온 사회와 사람을 여기에 맞추려는 현존 질서를 고쳐야 한다.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좀 더 심각한 질문이다. ‘좋은’ 의사, 법률가, 정치인, 경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능력이 무엇일까? 당대의 최고 능력자 이완용이나 이광수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어떤 능력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능력과 그 능력의 발현에 가치 판단이 따라야 하면 한 사회는 그 능력의 정체를 계속 성찰하고 회의해야 한다.

그러니 능력에 따른 보상과 배분은 더 논쟁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인권의 규범은 잠시 잊어도 좋다. 자기 회사 노동자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많은 임금(!)을 받는 최고경영자는 무슨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어떤 능력과 그 결과가 사회와 공동체에 무엇을 이바지하기에.

 

둘째, 다들 그토록 평등해야 한다고 하는 그 ‘과정’과 ‘기회’는 범위가 훨씬 더 넓어야 한다. ‘구조’를 빼고 난 다음에는 그 기회와 과정이란 끼리끼리 다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대에 그 기회와 과정이 거의 전적으로 계급과 계층에 연결되어 있다면?

사회정의로서의 기회는 그저(?) 교수가 될 기회, 법학전문대학원에 갈 기회, 조중동에 기자로 취직할 기회, 서울 강남에 집을 가질 기회만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시험과 성적만으로 말해도, 같은 성적으로 같은 직장과 연봉을 얻을 기회뿐 아니라 같은 성적을 얻을 기회, 나아가 그런 시험에 접근할 기회도 포함해야 한다. 아예, 자신의 삶을 꿈꾸고 설계할 기회는 어떤가?

알바에 치여 제대로 공부할 시간이 없는 학생은 성적으로 표현되는 능력을 보일 기회가 더 적고,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으면 어느 대학 어떤 성적을 논할 기회조차 없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의전원’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면, 예술이나 스포츠를 알거나 경험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또는 장애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이들에게 기회란 그리고 공평한 기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셋째, ‘결과’는 좀 더 평등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건강이라는 결과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가난한 집 출신이라고 해서 힘든 노동을 했다고 해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면 그건 숙명이니 인명재천이 아니라 불의(不義)다. 건강과 수명의 잠재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것이 공정과 형평의 기본선이 아닌가.

정도만 다를 뿐 다른 가치의 원리도 비슷하다. 임금, 소득과 재산, 교육의 불평등은 어떤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정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내가 충분히 알고 위험을 감수하기로 하고 선택한 길이 아니면, 그 결과는 좀 더 평등해야 한다. 이때 결과가 비슷한 기회를 공유한, 끼리끼리 비교한 결과가 아님은 물론이다.

한 사회와 공동체의 조직 원리로 정의를 말하는 한, 운과 팔자에 따라 평생의 행복과 고통이 결정되는 사회는 불의하다. 내가 선택한 곳에서 내가 선택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닌데, 내가 학업 능력을 고른 것도 아닌데, 나 혼자 그 결과를 온전히 견뎌내야 하는 것이 어떻게 정의인가? 어떻게 도덕이고 윤리인가?

 

확신하건대, 공정성과 형평은 경쟁의 규칙이라기보다 사회 연대와 협력의 정치적 원리다. 구조적 불평등과 그 고통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익의 정치와 정상배들이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동력을 악용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이마저 역설적 기회라고 할 수밖에.

모두가 골고루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사회로 가려면, 잘 운영되는 국회, 괜찮은 장관이나 공무원, 사법부 독립, 시험제도 이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한 걸음 더 공정성 논의를 밀고 가는 것이 당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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