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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질병으로 바라볼때 놓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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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소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무언가를 질병으로 비유하는 것에는 특별한 효과가 있다. 규제를 암 덩어리라고 말했던 전직 대통령의 말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규제를 기업 경영의 방해물로만 생각하는 시각, 그것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고 있음에도 마치 우리 모두에게 해악을 가져오는 것처럼 꾸며내는 뻔뻔함이다. 그렇다면 폭력을 질병으로 비유하는 것은 어떨까? 올해 국제 학술지 <비판적 공중보건(Critical Public Health)>에 실린 영국 육군사관학교 말트 리만(Malte Riemann) 교수의 논문은 질병이라는 은유를 넘어, 폭력을 실제 질병으로 간주할 때의 이슈들을 분석하고 있다(☞논문 바로가기: 폭력의 의료화를 문제화하기: ‘폭력 치료(Cure Violence)’ 계획에 대한 비판담론분석).

 

이 논문에 의하면 폭력은 크게 생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틀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생물학적 접근은 폭력을 유발하는 유전적 요인이나 호르몬처럼 이미 확립된 기질에 집중하고, 심리학적 접근은 폭력적 행동을 개인의 학대나 방임 경험 속에서 이해한다. 사회학적 접근은 폭력을 사회와 개인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은유적이든 직접적이든 간에 폭력의 고유한 성질을 포착하기 위해 이를 감염병과 비교한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후 폭력을 은유적 차원에서 질병으로 여기던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은유에 머물지 않고, 보건의료전문가의 개입이 필요한 실제 질병으로 보는 공중보건 접근에 길을 내주었다. 학계만이 아니라 세계보건기구(WHO)도 폭력을 ‘우선적인 공중보건 문제’로 정의했다. 이러한 폭력의 의료화(특정한 상황이나 증상, 특성들을 의학적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 힘입어 폭력에 개입하는 다양한 (비)정부적 공중보건 접근이 전 세계적으로 등장했다.

 

이 논문은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개입 프로그램 중 하나인 ‘폭력 치료'(Cure Violence, 이하 CV, 홈페이지: http://cureviolence.org/) 프로그램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총격중지 건강’(CeaseFire Health)으로 알려진 CV 프로젝트는 미국 시카고 지역에서 총기 범죄 감소를 목표로 2000년에 시작되었다. 전직 WHO 역학자였던 개리 슬럿킨(Gary Slutkin)이 주도한 이 프로젝트는 2017년 현재 미국의 23개 도시와 여러 나라들에서 실행되고 있다(참고: 개리 슬럿킨의 TED 강의. 폭력을 전염병처럼 치료하자). CV 모델은 미국 시장단 회의(US Conference of Mayors)를 통해 지지를 얻었고, 미국의학연구소(Institute of Medicine)와 유니세프(UNICEF)도 이 프로그램에 우호적이다. 논문은 CV의 웹사이트, 관련된 정부 문서, 담당자들의 논문과 언론 인터뷰 등을 비판담론분석(critical discourse analysis) 방법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CV가 무엇을 문제로 삼고 있는지, 그러한 정책적 접근의 바탕에는 어떤 가정들이 존재하는지, 그러한 전략의 효과는 무엇인지 등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폭력을 질병으로 보는 시각은 질병 통제에 사용되는 역학적 방법과 전략을 통해 폭력을 통제하고 예방할 수 있다고 본다. 프로그램 책임자 슬럿킨에 따르면, “폭력은 은유가 아닌 실제 감염병이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따라서 CV는 감염병 퇴치 전략을 모방하는데, 이는 폭력 행동의 전파를 중단시키기 위해 세 가지의 상호관련된 요소들에 의존한다. 식별, 단속, 행동 변화이다.

우선 식별. 이는 CV의 첫 번째 단계로, 감염병이 퍼져나간 구역을 식별해낸다. 즉 과거에 폭력적 행동이 지속적으로 많았던 곳을 기반으로 역학적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총에 맞거나 총을 쏠 위험이 높은 ‘고위험’ 개인들을 정의할 수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항목에서 4개 이상에 해당하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1) 폭탄을 운반하거나 폭탄에 접근할 수 있는 경우 2) 범죄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 3) 불법 약물 거래 등 위험한 길거리 행동에 연루된 경우 3) 최근(90일 이내)에 총기 사용의 희생자가 된 경우 4) 16-25세 사이인 경우 5) 사람을 대상으로 한 범죄 때문에 감옥이나 소년원에 있다가 최근에 석방된 경우.

두 번째 단속이다. 이 단계는 감염병이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확산되는 것에 착안,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해 일어나는 폭력의 전파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 절차를 위해 CV는 VI(폭력 단속반, Violence Interrupters)라 불리는 사람들을 고용한다. VI는 신중하게 선발해야 하는데, 그들이 고위험군 청년들에게 ‘믿을만한 전달자’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VI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고위험군으로, 범죄조직 구성원이었거나 수감전력도 있지만 이제 범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거 자신의 경험을 발판삼아 또 다른 고위험군을 찾아내며, 이를 통해 폭력 행동이 발생하기 전에 개입한다.

마지막 단계는 행동 변화. 이 단계에서는 OW(지역 활동가, Outreach Workers)라 불리는 사람들이 활약한다. OW는 VI처럼 고위험군 개인들과의 신뢰관계를 통해 그들을 고용, 주거, 교육 등 긍정적 기회와 자원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CV는 집회, 행진, 바비큐 행사, 워크숍 등 공동체 중심 접근을 통해 지역 공동체의 규범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도 병행한다. 이러한 접근은 몇몇 개인들이 자신의 행동을 바꾸고 반폭력 규범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긍정적 감염병’으로 공동체에 퍼져나갈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이 논문은 CV 프로젝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분석하여 이러한 접근이 초래하는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CV는 폭력이 발생하는 원인과 해법을 질병에 대한 의학적 진단과 치료 모델로 대체함으로써 폭력을 설명하는 사회·정치·경제적 불평등을 가려버린다. 슬럿킨의 말처럼 폭력이 감염병이라는 것이 더 이상 은유가 아닌 과학적 사실이라면, 폭력을 다루는 비과학적 해결책들은 폭력의 전파를 막는 데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이 때 비과학적 해결책들이란 “빈곤, 열악한 교육, 가족 구조 같은 요인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CV가 상정하는 ”폭력을 예방하고, 폭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행동변화에 기반한 역학적 접근이며, 이는 개인적 수준에서의 개입이다. 즉 폭력 행동을 가져오는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위험요인”에 집중하는 것이다. 논문은 이것이 결국 개인 자체가 병리라고 진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폭력 행동은 “습득하거나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폭력 전파에 대한 면역력을 얻는 데 필요한 자기 관리 능력이 부족한 개인들이 결국 “고위험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총기 사용에 관련한 폭력 뿐 아니라 가정 폭력 등 다른 폭력의 영역에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

 

둘째, CV 접근은 생물학적 감염 가정에 기초한 새로운 정체성을 생산하면서 ‘정상’과 ‘병리적’인 것의 경계를 그린다, 고위험군을 식별하는 통계 작업이 순수하게 현상을 기술하는 것에 그친다 하더라도, 이러한 위험군은 “자연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이 식별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즉 폭력에 대한 공중보건적 접근은 가치중립적, 기술적인 것을 넘어서, 위험한 신체와 위험한 주체성이란 사회적 정체성과 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고위험군은 웹사이트와 전문가들의 발표 자료에서 ‘비백인’으로 나타난다. CV 프로그램에서 폭력의 희생자, 잠재적 가해자, 고위험군은 현저하게 비백인이며, 반대로 보건의료전문가, 과학자, 정부 대표들은 백인의 모습이다. ‘정상’과 ‘병리적 개인’의 경계에는 인종이란 구분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주변화된 사람들은 폭력으로 오염된 구역에 살며 폭력에 감염될 수 있는 ‘고위험군’으로 다시 한 번 주변화된다.

 

 

마지막으로, CV가 ‘위험한’ 사람들에게 개입할 때의 목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생산성을 개선하거나 복구하여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는 ‘건강한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건강한 시민은 보건의료 서비스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자립적이고 자신을 마치 기업처럼 다루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질병에 대해 스스로 예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논문은 사회문제를 “질병”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폭력을 공중보건 문제로 재정의하기 시작한 것이 신자유주의 광풍이 시작되던 1980년대 초반부터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조직하는 것과 관련 있다면, 의료화는 이러한 통치 논리 중 한 가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폭력은 비용이 많이 든다. 폭력 수준이 높은 공동체들은 경제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 기업들은 구매력이 제한되거나 물리적 안정성이 제한된 곳에 투자하기를 꺼려한다. … 폭력적 행동은 경제적 결과에 해롭다.” CV 홈페이지에도 게시된 이러한 설명은 폭력에 대한 의료화가 개인의 생산성 향상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건강에도 기여한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

 

이쯤 되면 드는 생각은 그래서 CV가 폭력을 ‘치료’하는 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미국 형사사법 프로그램 사무국(U.S. Office of Justice Programs) 산하 연방 형사 사법 연구원(National Institute of Justice)이 운영하는 www.CrimeSolutions.gov에서는 CV를 “효과적”이 아니라 “유망한” 중재로 분류하고 있다(이 사이트는 형사사법 정책평가를 통해 미국에서 실시한 모든 범죄관련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결과를 “효과적”, “유망한”, “효과 없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고, 배우고, 일하고, 여가를 즐기고, 가족을 부양하고, 그리고 안전한 공간에서 쇼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폭력이 ‘치료’된 후 CV가 말하는 건강한 시민의 모습의 모습이다. 쇼핑의 권리를 빼고 다른 것을 넣으면 안 될까? 이를테면 사회·정치·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폭력의 토양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시민의 모습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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