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대의제 민주주의가 무력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국민의 여망이니 시민의 뜻이니 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유권자’라는 말은 아예 사어(죽은 말)가 될 지경이다. 정치체로서의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입법부인 국회가 그중 더 심하다. 해가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올해 더 나쁘다. 다들 9월 정기국회에서 무얼 할 것처럼 미루더니, 막상 일을 시작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지금 진행 중인 국정감사만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싶다. 모두 내년 총선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언론에 이름 알리기 노이즈 마케팅만 난무한다.
국회와 국회의원 탓만 할 수 없으니 더 답답하다. 국회의원뿐 아니라 모든 선출직 공직자가 다음 선거에 목을 매는 일이야 이젠 상식이 아닌가. 어떻게든 선거권자의 시선을 끌고 이름 알리기에 골몰할 때 ‘대의’란 전체 사회의 정치 발전 수준을 넘기 어렵다. 지역구 유권자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에 둔감한 국회의원은 없으니, 딱 그만큼을 대표한다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구조적 문제가 더 크다. 예를 들어, 선출되는 국회의원이나 시장, 군수가 누구를 대표하는지 하는 ‘대표성’ 문제. 한국의 선거는 지역 대표성이 독점하는 구조(제도)라 모든 이해관계가 지역이라는 역사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추상화된다. 나머지 대표성은 말뿐이다. 현실에서 그 지역은 차라리 다른 모든 것을 억압하는 권력이니, 계층, 나이와 세대, 직종이나 직업, 젠더, 이념은 제도권 바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상식적인 구조 문제는 이 정도로 해둔다. 하루 이틀 거론한 문제가 아니라면, 이런 구조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개인을 채근하고 압박하는 쪽이 효능감이 더 높을지 모른다. 한 마디로, 국회와 국회의원더러 제발 이렇게 좀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소박한 희망이라는 쪽이 더 정확하다.
첫째, 공부하고 ‘전문성’을 키우시라. 무슨 특별한 전문가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국회의원(다른 선출직 공직자도 마찬가지다)은 여느 사람에 비해 더 큰 주목을 받고 그의 말은 여차하면 언론에 보도된다. 꼭 행정부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힘이 세니, 그만큼 잘 알고 나서야 한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개인이 터무니없는 말을 하면 필시 부정적 효과가 크다. 좋은 의도로 원격의료, 정신장애, 신약 개발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제발 좀 충실하게 알아보고 공부한 다음 발언하고 입법에 나서기 바란다. 훗날 누군가 기록을 뒤져 그 말을 분석할 것을 의식하시라.
‘의견’과 ‘소신’은 제발 비공식 자리로 미루시라. 공부가 충분하지 않으면 차라리 침묵하시라. 정치인이 다루는 정치와 정책은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나는 이렇게 믿는다” 수준을 넘어 최선의 과학과 객관, 근거에 기초해야 한다. 그 말 뒤처리를 하느라 수많은 사람이 할 일을 못 한다.
둘째, 자신이 없으면 믿을 만한 근거를 잘 따라 하거나 그에게 맡기시라. 뭐 한 가지라도 정말 잘 알고 전문적이기가 그리 쉬운가. 학습하고 내가 직접 하기 어려울 때 한 가지 방법은 잘 판단하여 의지하고 위임하는 것이다.
왜 그 많은 외부 자원이나 능력과 협력하거나 연대하지 않는가? 자신의 성과로 독점하고 싶어서? 달리 보상할 것이 없다고? 그 정도 이익에는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나 조직도 아직 많다. 그냥 자신의 이익에 충실해도 얼마든지 이렇게 일할 수 있다.
셋째, 개인적 관심과 이익을 최소한으로. 사소한 잇속을 차릴 것이면 차라리 지역 구민이나 소속 정당의 집단적 이해관계가 낫다. 노골적인 불법과 부정이 아니라도 개인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면 그 악영향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곳곳에 스며있는 ‘작고 은밀한’ 이해관계가 가장 나쁘다. 흔히 비공식적이고 잘 드러나지도 않는, 지위와 권력을 활용한 민원이나 청탁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전화로 사정을 알아보지도 못하냐는 웃기는(!) 변명이 많지만, 자기 이익을 구하는 행위임이 명백하다.
부정과 불법이라서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제도와 정책을 왜곡하고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손해를 입힌다. 그 악명 높은 취직 청탁은 차라리 사소한 일, 만일 신약 허가나 건강보험 급여 인정을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해보라.
마지막 부탁은 앞의 몇 가지보다 좀 더 적극적이다(그래서 더 어렵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은 하지 못하는 발언을 해 달라는 것. 이 또한 거창한 철학이나 이념을 대변해 달라는 뜻이 아니다. 다르게 말할 기회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전달하는 역할 정도라도 하시라.
오늘날 그 많은 고통과 한숨은, 또한 좌절과 원망은 그 어떤 사회적 주목도 받지 못할 때 더 깊어진다. 법과 제도는 명백히 이들의 편이 아니다. 시위와 농성, 파업과 충돌, 굴뚝과 톨게이트, 민원과 청원으로는 신문 기사 한 줄도 불가능하지만, 당신들은 할 수 있지 않은가.
구구절절 말했지만, 사실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아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건네는 말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이면, 직접 이 글을 보는 이가 한 사람도 없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들의 귀는 멀리 그리고 비뚤어져 있다.
부탁의 말이 무력하면 하는 수 없이 스스로 해야 하는 실천으로 되돌아온다. 부탁과 권유가 부질없을 때, 정치를 그리고 정치인을 이렇게 만드는 ‘시민의 정치’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일한 경로. 투표를 통해, 그리고 일상의 실천과 압력, 영향을 통해 국회와 국회의원이 이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압박하고 강제해야 한다.
당장 우리 모두 각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이제 대안적 언론이라는 이름까지 얻은 소셜 미디어는 어떤가. 블로그와 댓글은? 시간 날 때 집 주위에 있는 지역구 사무실 방문도 괜찮지 싶다.
이 <서리풀 논평> 또한 그런 정치적 실천이다. 널리 옮겨 주시기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