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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성, 그 참을 수 없는 모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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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언덕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당신은 취약한가? 이 질문에 아마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어떤 점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실제로 수년 전 미국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테드 강연에서 자신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긍정하는 용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전 세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다(☞브레네 브라운: 취약성의 힘). 하지만 취약성을 단지 인간 보편의 실존적 특성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실제로 취약성은 심리적 차원 외에도 경제적·지역적·신체적 요소처럼 여러 객관적 측면에서 특별한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일부’ 사람들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고 있다. 모두가 취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아무도 취약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이처럼 취약성은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뜻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다. 따라서 취약성을 논할 때에는 어떤 의도와 맥락 속에서 언급되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철학적·심리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활용될 때에는 ‘누가’, ‘어떻게’ 취약한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개념을 적당히 뭉뚱그려 표현하게 되면 많은 오해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정부 복지정책의 대상으로 ‘취약계층(혹은 취약집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 노인, 영유아, 이주민 등 구체적 대상의 범주와 함께 주거, 교육, 재난 등 그 적용 영역을 특정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엄격한 개념적 정의가 요구되는 학술 논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특히 건강불평등처럼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찾는 연구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연구논문들이 취약 개념의 정확한 정의를 생략한 채 사용해 온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통상적 어법에 따른 부주의의 결과일 수 있지만, 어떤 체계적인 요인으로부터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이런 모호한 표현이 결과적으로 실제 어려운 이들을 위한 사회변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더욱 그 가능성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 보건학 학술 논문들이 취약성을 어떻게 사용해왔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한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진의 논문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논문 바로가기: 모호함, 권력 그리고 보건: 보건학 논문에서 취약함의 사용)

 

연구진은 기존 보건의료 연구에서 ‘취약성’이라는 개념을 모호하게 사용하는 것이 보건 문제의 구조적 본질을 감추는데 기여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이를 밝히기 위한 텍스트 분석을 시행했다. 분석 대상 문헌은 일차적으로 지난 3년간(2015~2018년) 미국 보건학회지와 캐나다 보건학회지에서 출판된 논문들 가운데 제목과 초록, 키워드에 ‘취약성’이 포함된 것들로 했다. 이 가운데 ‘취약성’이 최소 세 차례 이상 본문에 언급되었으면서 동시에 한 번 이상 구체적인 정의 없이 모호하게 사용된 경우를 선별하여 총 23편의 논문을 분석대상에 포함하였다. 분석방법으로는 사회적 과정과 담론, 권력의 행사에 초점을 맞추고 텍스트에 내장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탐구하는 데 유용한 ‘비판적 담론분석’(Critical Discourse Analysis; CDA)을 활용하였다.

 

분석결과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아래 예문과 같이 다양한 주제의 텍스트에서 분명한 정의 없이 ‘취약인구(집단)’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때 독자는 특정되지 않은 취약집단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스스로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예문) 많은 취약인구가 있는 주들에서 치과의사의 감독을 벗어난 치위생사의 의료행위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많은 텍스트에서 인구집단의 취약성을 사회·정치·경제·역사적 조건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예문) 사회복지사는 종종 여러 사회적 결정요인에 의해 불리해지는 취약인구의 건강 결과와 보건 서비스 전달을 향상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

 

위 예문에서처럼, 어떻게 읽는지에 따라 취약성은 구조적 장애물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던 것이 ‘악화’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다른 텍스트에서는 특정 집단의 내재적 취약성에 대한 인식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예문) 취약인구 가운데 정신질환의 유병률이 높은 것은 인구학적 특징이라기보다 그들의 공통된 경험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요인의 결과일 수도 있다(may be).

 

위 예문에서, 연구자는 높은 유병률의 원인으로 외부 스트레스 요인을 지목하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질병의 취약성이 인구집단의 민감성이나 인구학적 특징과 더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심지어 어떤 연구에서는 특정 집단이 특별히 어떤 행동이나 조건에 취약하다는 근거가 없음에도 취약성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한 연구는 이주민, 난민 가정에서의 아동학대에 관련된 연구 문헌을 고찰하면서 “이주민이나 난민 아동이 아동학대의 위험성이 더 높다는 근거는 없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런 결론 이면에는 여전히 이들을 “학대 위험성이 있는 취약한 집단”으로 언급하는 자기모순이 자리해 있다.

 

한편 취약인구와 달리 충분한 서비스 혜택을 누리고 있는, 전혀 취약하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을 고려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미국 완화의료서비스에 대한 다양한 집단들의 ‘필요(needs)’를 살펴본 한 연구는 제때 적절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의 긴 목록을 일일이 언급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서비스가 대체로 백인들을 위해 설계되고 자원이 배분된다는 사실은 진술하지 않고 있다.

 

또한 많은 연구들이 나쁜 건강 결과를 야기하는 정책과 법률에 대해 기술하지만, 그러한 정책 결정에 책임이 있는 집단, 그리고 이들이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었다. 분석은 철저히 ‘취약인구’의 건강상태, 사고방식, 생활조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분석결과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제시했다.

 

첫째, 누가 취약집단이며 왜, 어떻게 취약한지에 대해 연구자들이 “빈칸”으로 남겨둘 때 독자들은 이를 스스로 채워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인종주의처럼 기존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 거짓된 생각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결과 취약성은 개인의 “나쁜 결정”이나 “부정적인 행동” 또는 생물학적 운명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될 위험성이 커진다. 이렇게 되면 결국 보건은 취약집단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 취약집단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원래부터 취약한 이들이 더 취약해지지 않도록 외부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둘째, 취약성과 관련된 담론은 권력을 은폐한다. 취약성이라는 단어는 ‘유리한 자’와 ‘불리한 자’ 사이의 역학관계를 ‘자선’의 일종으로 나타내며, 그러한 불리함을 발생시키는 과정에서 ‘유리한 자’가 맡은 역할을 교묘히 감춰준다.

 

(예문)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권력, 지식, 물질적 수단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더 강한 자에게는 타인의 취약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불리한 자를 착취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존중과 보호’의 요청은 건강불평등을 초래한 착취의 역학관계를 묘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기껏해야 문제를 완화해 줄 ‘말단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그치게 된다. 어떤 연구자들은 근본적 변화가 어렵다는 생각에서 말단 개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일 수 있지만, 이러한 판단과정을 모르는 독자들로서는 문제의 근본이 바로 연구가 다루고 있는 “취약인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권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보건 문제는 개입할 수 없는 고정된 ‘환경’과 개입 가능한 ‘취약인구’로 귀결되고, 이때 건강향상을 위한 권력자들의 책무성은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에서는 취약성을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재 주류 담론의 맥락에서는 어떤 집단이 특히 ‘취약’하다고 말함으로써 동정심과 정책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장점이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맥락에 따라 취약성을 전략적으로 사용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분석에 포함한 학술지의 숫자나 대상 기간 등이 크게 제한되어 있고, 또 취약성과 유사하거나 연관된 개념어들을 함께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취약성의 개념적 모호함이 보건 문제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분석한 최초의 시도라는 의의가 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도 그동안 부주의하게 사용해온 취약성이라는 용어가 갖는 위험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 서지 정보

Amy S. Katz, et al (2019). Vagueness, power and public health: use of ‘vulnerable’ in public health literature. Critical Public Health. Published online: 27 Aug 2019.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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