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아픈 배우자를 돌보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녀가 간병을 맡기 어렵거나 간병인을 고용할 경제적 여력이 없다면 ‘병수발’은 자연스럽게 배우자의 몫이 된다. 사실 간병은 고강도의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지만 가족 사이에서의 돌봄 활동은 좀처럼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제대로 드러나지조차 않는다. 아픈 가족의 간병비 부담에 허리가 휜다는 서민들의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어봤지만, 배우자를 간병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좀처럼 없다. 정부도 간병서비스의 공적 제공이 급할 것 없다는 분위기다 (▷관련 기사: 간병비 급여화 시급하지 않다는 정부에 요양병원들 ‘분통‘). 일상에서 위기의 징후들이 분명하게 감지되지만 ‘진짜 위기’로 이해하고 대응하려는 움직임은 더디다. 무엇보다도 돌봄이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로 간주되었던 탓이 크다. ‘노-노 케어’라는 것이 고령화 시대를 맞는 누구에게나 닥친 위기 같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아닌 ‘가장 소외된 사람’들의 위기라는 사실도 여기에 한 몫 한다.
배우자 간병이 모든 사회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탄탄한 공공 돌봄 서비스 제공 체계를 갖춘 사회에서 배우자 간병은 공공 서비스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노동 강도가 높지 않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도 적을 것이다. 반면 한국처럼 국가가 지원하는 공공 간병 서비스가 턱없이 부족하고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돌봄의 역할이 강요되는 사회라면, 배우자 간병은 노년기 여성의 건강과 삶의 질을 해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네덜란드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 Social Science & Medicine>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유럽의 건강, 노화, 은퇴 조사 (SHARE: Survey of Health, Aging and Retirement in Europe)’에 참여한 유럽연합 17개 국가의 5개년 자료를 이용한 이 연구는 50세 이상이면서 배우자와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배우자 간병의 건강 영향을 분석하였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배우자에게 간병을 제공하는 집단과 제공하지 않는 집단의 건강상태를 비교하거나, 배우자 간병 역할의 시작 혹은 종료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별개로 분석해왔다. 연구팀은 기존 연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배우자 간병 역할의 시작과 종료라는 이행 과정에서 간병 제공자가 경험하는 건강 변화에 주목한다. 또한 기존 연구가 주로 우울감 같은 단일 지표를 이용해서 건강을 평가해왔다면, 이 연구는 노년기 신체건강, 정신건강을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쇠약 지표 (Frailty Index)’를 활용했다. 마지막으로 연구팀은 배우자 간병 역할 이행의 건강 영향이 복지국가 유형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주목했다. 17개 유럽 국가를 돌봄에 대한 태도나 복지국가 유형 등에 근거하여 북유럽형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서유럽형 (오스트리아, 밸기에,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스위스), 남유럽형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동유럽형 (체코, 에스토니아, 폴란드, 슬로베니아)의 네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분석 결과, 복지국가 유형이 어떠하든 배우자 간병을 시작한 노인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건강이 쇠약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연구에 포함된 모든 유럽 국가에서 배우자를 간병하는 것은 노인들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한편 배우자 간병 역할에서 벗어났을 때 남동부 유럽 국가 여성들에서만 건강 개선 효과가 관찰되었다. 이는 남동부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배우자 간병을 멈춘다고 해서 건강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한편으로는 그만큼 배우자 간병의 부정적 건강 영향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이 결과는 남동부 유럽 같이 복지국가가 덜 관대하고 가족 중심적 사회일수록 여성에게 강도 높은 비공식 간병 노동이 강요되고, 따라서 그 역할로부터 벗어날 때 얻는 건강 개선 효과가 훨씬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북유럽처럼 배우자가 저강도 ‘도움’ 수준의 간병을 제공하는 사회에서 배우자 간병을 멈춘다고 건강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 현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동부 유럽 국가에서 남성이 배우자의 간병을 멈추었을 때 건강이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전통적인 성별 역할과 젠더에 따라 배우자 간병 노동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달라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배우자 간병이 당연한 ‘여성의 역할’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배우자를 돌보는 여성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주변뿐 아니라 스스로도 높은 기준을 두는 경향이 있다. 기준이 높으면 스트레스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반면 남성의 배우자 간병은 ‘의무’이기보다는 개인의 ‘선택’이 된다. 또한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된다. 따라서 배우자 간병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보니, 그 역할에서 벗어나도 건강이 개선되는 효과가 적은 것이다.
한국 노인을 대상으로 동일한 연구를 진행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한국에서도 최근 암 환자의 간병 문화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관련기사: “암환자 대부분 배우자에게 의존…아들은 경제적 도움, 딸은 정서적 지원“) 예상한 대로, 배우자 의존도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신체활동의 경우 남성 암 환자의 86.1%가 배우자에게 의지하는 반면, 여성 암 환자는 36.1%로 남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여성의 돌봄 노동의 영역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우리사회는 엄마 – 애인 – 부인 – 딸과 며느리라는 존재로 평생 동안 수행해온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자를 간병하는 여성 노인들의 경험이 더 많이 이야기되고, 노동으로 인정받고, 또 이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공적 서비스가 확대되기를 기대해본다.
서지 정보
Uccheddu, D., Gauthier, A. H., Steverink, N., & Emery, T. (2019). The pains and reliefs of the transitions into and out of spousal caregiving. A cross-national comparison of the health consequences of caregiving by gender. Social Science & Medicine, 240, 112517.
https://doi.org/10.1016/j.socscimed.2019.112517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277953619305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