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
성 평등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과제이며, 국경을 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한국에서 페미니즘 의제가 확장되는 과정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2014년 유엔여성기구의 HeForShe 캠페인을 알리던 엠마 왓슨의 연설을 기억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성 평등은 앞으로 인류가 달성해야 할 공식 목표 중 하나이다. 2015년 국제사회가 합의한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의 17개 목표 중 다섯 번째 목표가 “성 평등과 모든 여성․소녀의 임파워먼트 달성하기”이다.(☞ 바로 가기 : 유엔여성기구 ‘SDG 5: Achieve gender equality and empower all women and girls‘)
유엔뿐 아니라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 또한 젠더 평등을 원칙이자 목표로 중요하게 여긴지 오래다. 세계은행 총재였던 짐 용 킴(Jim Yong Kim)은 “세계은행의 두 가지 목표인 극심한 빈곤을 퇴치하고 인류 번영을 공유해나가는 데에는 전 세계 여성과 남성, 소녀와 소년의 완전하고 동등한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빈곤은 대체로 개인보다는 가구 단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한 지붕 아래 사는 모두가 똑같이 빈곤을 경험할 것으로 간주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똑같이 가난한 집에서도 여성, 아동, 장애인, 노인에게 돌아가는 자원이나 이들이 누릴 기회는 상대적으로 더 적다. 이는 한국 같은 고소득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 세계은행 홈페이지 ‘Voice and Agency : Empowering Women and Girls for Shared Prosperity cb’ 이미지 갈무리.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은 빈곤 퇴치에서 건강 증진에 이르기까지 인류 번영의 구체적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서 젠더를 체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세계은행이 말하는 소위 “젠더 스마트한 해답”, 구체적으로 “여성이 경제적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노력”하는 전략은 과연 여성들의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했을까? 2019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의 연구자가 <국제보건서비스저널>에 발표한 논문(☞ 바로 가기 : ‘새로운 대안인가 오래된 속임수인가? 세계은행의 젠더 전략과 그것의 건강 영향‘)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은행은 민영화와 시장 규제 완화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건강과 교육을 포함한 공적 서비스를 시장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그 결과는 여성들에게 더욱 불리했다. 동시에 국제금융시장으로 전 세계인을 포섭해나간다는 원칙에 따라 저소득국가 여성들을 다양한 소규모 사업을 운영하는 경제 주체로 만들었지만 이는 여성들 사이의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둘째, 세계은행은 젠더 평등과 빈곤 퇴치를 위해 민관협력을 강조하고 정부 역할을 축소할 것을 강권했다. 그에 따라 공공부조나 보편적 사회보장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근로복지연계(work-fare)가 확장되었다. 근로복지연계는 소득 활동 참여를 통한 자립을 명분 삼아 가장 가난한 여성이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도록 강요하면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낙인을 강화했다. 더불어 건강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는 데 기여했다.
셋째, 세계은행은 공적 영역이나 국가 수준에서가 아니라 국지적 지역사회 활동에서의 여성 임파워먼트만을 배타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여성의 시민권을 탈-정치화했다. 지역사회기반 프로그램들은 “포용적 개발”을 내세우며 부정적인 남성성 규범을 변화시키고 여성들의 긍정적 기여를 인정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역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실질적으로 실패했다. 여성들은 지역사회의 견고한 가족주의 규범에 따라 누군가를 돌보고 돕는 비공식 노동을 수행하며 이 과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미시적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적 자원과 권력을 나누는 공식 정책 과정에 참여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논문의 저자는 여성의 지역 거버넌스(local governance) 참여를 강조하면서,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제한적으로만 부여하는 세계은행의 전략이 오히려 여성들의 정치세력화를 억압하는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번영과 발전을 목표로 삼는 많은 기획이 여성을 시장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해왔다.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경제적․사회적 기회와 다양한 역량을 얻는 것은 여성 자신의 행복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불평등한 젠더 규범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와 노인 돌봄, 지역사회 건강증진 활동처럼 여성에게 적합한 일로 여겨지는 많은 노동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전문성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 가족 안에 갇혀 무급으로 일하던 여성들에게 이제 돈도 받으면서 지역사회 건강을 위해 일해보라고 권유하지만, 그 끝에는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가족 같은 보살핌과 따뜻한 태도를 기대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충분한 경제적 보상이나 정치적 발언권을 얻지 못한 채, 봉사하고 희생하는 ‘마을의 딸/며느리’라는 새로운 굴레에 처하기 쉽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 경제 참여는 동네에서든 세계적으로든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제는 단순히 ‘참여’를 넘어 여성들이 무엇에 대해,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말할 차례이다. ‘여성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두루뭉술한 듣기 좋은 말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불안정하고 질 나쁜 일자리라도 감수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여성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젠더 불평등 구조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에 더해 여성 당사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세력화가 필요하다. 지속가능개발의제 다섯 번째 목표인 “성 평등과 여성 임파워먼트”는 경제 성장을 위한 여성의 동원이 아니라, 견고한 젠더 불평등 구조의 변화임을 강조하고 싶다.
참고문헌
– Power, L. (2019). New Ways or Old Tricks? The World Bank’s Gender Strategy and Its Implications for Health.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 0020731419885090.
– World Bank. (2014). Voice and Agency: Empowering women and girls for shared prosper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