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소(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일을 하다 다치거나 병을 얻게 되면 그 자체로 정신건강에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산재보험을 통해 약간의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 다친 몸과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기는 어렵다. 여기에 ‘운이 좋다면’이란 말을 붙인 것은 산재보상 청구 자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고, 산재 청구를 해도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산재보험제도는 원래의 취지와 달리 산재보상을 받기 어렵게 만드는 여러 장벽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산재청구과정 자체도 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한국에만 고유한 것도 아니다.
최근 캐나다 노동과 건강연구소 연구팀이 국제 학술지 <직업재활저널 Journal of Occupational Rehabilitation>에 발표한 논문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연구팀은 근골격계 질환 산재 환자들이 산재보험 청구 기관의 사례 관리자, 우리로 치면 근로복지공단 직원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감정이 이후 정신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했다(☞논문 바로가기: 산재보험청구과정에서 느끼는 공정성은 산재 이후 정신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연구팀은 2014년 6월에서 2015년 7월까지의 기간에 호주 빅토리아 주에서 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재보험을 청구한 사람들 중 무작위로 585명을 표집하여 보험 청구 시점, 6개월 후, 12개월 후 세 번에 걸쳐 정신건강 수준을 측정했다. 또한 보험청구 시점 조사에서는 담당직원과 접촉했을 때 의사소통 측면과 정보 측면에서 부당함을 느꼈는지 물었고, 6개월 후 조사에서는 담당직원과 청구 건에 관하여 어떤 종류든 의견 불일치가 있었는지 물었다. 의사소통 측면에 대해서는 담당 직원이 ‘당신을 정중하게 대했나요?’ ‘당신을 품위와 존중을 가지고 대했나요?’라고 질문했다. 정보 측면에 대해서는 담당직원이 ‘당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었나요?’ ‘당신과의 의사소통에서 열려있고 거짓이 없었다고 느꼈나요?’ ‘직장복귀과정을 주의 깊고 완전하게 설명했나요?’ ‘적합한 시간에 세부사항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나요?’ ‘당신의 특정한 필요사항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였나요’라는 질문으로 평가했다. 연구팀은 이들 질문에 노동자가 동의하는 정도를 ‘매우 그랬다’에서 ‘전혀 그렇지 않았다’에 이르기까지 다섯 단계 대답으로 측정했다. 담당직원과 의견 불일치 여부는 불일치 없음, 불일치 해결, 불일치 미해결로 측정했다.
분석 결과, 산재 청구 시점에 의사소통 측면과 정보 측면에서 담당직원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던 노동자일수록 정신건강이 더 나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구 당시 담당직원에게 느꼈던 부당하다는 감정은 6개월 후, 12개월 후에도 여전히 정신건강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부당하다고 느꼈던 감정이 클수록 노동자와 담당 직원의 의견 불일치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것이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동자들이 의사소통 측면과 정보 측면에서 느낀 부당함의 정도가 한 단계씩 높아질수록 세 시점 모두에서 심각한 정신질환의 위험이 각각 20%와 28%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담당직원과의 첫 소통과정에서 느꼈던 부당함의 영향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연구는 직장에서 일을 하다 건강이 나빠진 것 뿐 아니라 산재보상 청구과정 자체가 노동자의 정신건강에 해를 끼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이미 건강을 잃은 노동자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정중한 의사소통 태도와 명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정신건강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을 하다 아프게 된 노동자들에게 예의를 다하고 관련된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는 것은 산재보험 담당 직원에게만 요구될 일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작업환경 정보를 영업 비밀이라고 숨기는 것,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사고를 당한 이들이 제도 안에서 또 다시 부당한 피해를 겪지 않도록 하는 것, 그들의 피해가 어쩔 수 없는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고를 나게 만들거나 방치한 기업과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러한 더 큰 사회적 예의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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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