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심사가 복잡하다. 뜬금없이(?) 이란과 미국이 전쟁을 시작할 듯하더니 불똥은 금방 북한, 그리고 남한으로 튀었다. 미국을 축으로 돌아가는 국제 정치가 우리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제 국제와 국내를 가를 수 없는 일이 많다.
더 답답한 일과 현상도 있다. 이란 사태와 비교하면 오스트레일리아(호주)가 겪는 재앙은 공중파 뉴스에서도 그저 외국발 ‘단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나라가 주인공인지, 누가 무엇을 얻고 잃는지, 어떤 일이나 사건인지에 따라 뉴스의 분량, 관점, 해석 모두 치우쳐 있다. 이는 불평등한 정치의 산물이며 아울러 새로운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오늘 우리는 이런 권력관계를 거슬러 호주를 뒤덮은 산불 사태, 그 재앙에 주목하려 한다. 한 나라의 국내 사건으로 봐도 배울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국제적 맥락에서 보면 가장 임박한 도전이며 과제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화두인 기후변화, 아니 기후위기의 과학과 정치가 자리한 역사적 사례라 할 만하다.
쉽게 휘발되는 기억을 되살리려면 그동안 단편적으로 들었던 재난의 심각성을 다시 불러내야 한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체계가 내포한 한계. 대화재, 재난, 재앙 등을 거쳐 급기야 ‘아마겟돈’이라는 표현도 등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위기를 실감하기 어렵다.
“호주 전역의 3분의 1에 가까운 지역이 화재 영향권에 들었다. 호주 정부 당국 발표를 보면 1월 8일 기준으로 남한 면적보다 넓은 1070만 헥타르가 불에 탔다. 건물 5900여 채가 불에 탔고 최소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10만 명이 화재를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재산 피해는 정확하게 집계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기사 바로가기)
“주요 도시인 시드니와 캔버라의 대기는 산불 연기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보건 및 환경 당국은 앞으로 폭염과 스모그가 지속되면서 심각한 질병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특히 노약자나 환자 등 취약 계층의 위험이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뉴질랜드 상공을 노랗게 물들인 호주 산불은 지난 7일에는 남미로까지 확산돼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곳곳에서 흐려진 하늘이 관측되기도 했다.” (기사 바로가기)
그 면적, 죽은 사람 수, 10억(!)에 이른다는 동물의 죽음, 생활과 스모그의 느낌이 어떤가? 수없이 불타고 죽어야 겨우 눈길이 미친다는 생활세계의 초라함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조차 지구 반대편 남반구의 위기를 일깨우기는 턱없이 둔하다. 그곳 사람들이 겪는 중이며 또 앞으로 겪을 ‘느린 폭력(slow violence)’, 예를 들어 장기적 건강 피해 같은 것은 보통 관심사에는 끼지도 못하리라(건강 피해 규모는 가장 최근 분석을 참고할 것).
원인과 그 근본을 찾는 것은 더 어렵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기후변화라는 것이 중론이다. 집권당과 총리가 대놓고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중에도 강수량 감소와 유례없는 더위에다(직접 원인) 기후변화가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정설에 가깝다(기사 바로가기).
직접 원인을 넘어 기후변화를 거론하는 이유 그리고 그 효과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러 측면 중에서도 특히 ‘정치화’에 주목한다. “모든 문제는 나쁜 정치 때문”이라는 환원주의 때문이 아니라 정치화야말로 대응과 실천에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통계와 그래프가 가득한 기후(강수량과 더위), 복잡한 지도를 동원해야 하는 인도양의 바다 온도, 불타는 지역의 자연조건 등을 기후변화 프레임으로 포괄하면 기술과 정책은 즉시 정치경제 그것도 국제 수준의 정치경제로 비약한다.
기후위기는 아무리 좁게 보더라도, 국내에 한정해도, 정치경제를 벗어나기 어렵다. 호주가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요약하면, 호주 보수 정치인들은 “기후변화와 산불의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야당조차 대안 세력이 아니며, 호주에서 유통되는 신문의 58%를 소유한 “루퍼트 머독은 대표적인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다.”(기사 바로가기)
출처; http://bit.ly/2uyP31g (호주의 한 사진작가가 제작한 3D 이미지)
우연과 전통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더 자세하게 분석할 여유는 없지만, 더 근본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앞서 인용한 기사에는 경제 또는 ‘먹고사니즘’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호주는 세계 1위의 석탄,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전세계 석탄 수출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호주는 세계 비영리 기후변화 연구기구가 지난해 말 발간한 ‘2020 기후변화 퍼포먼스 인덱스’ 보고서에서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정책 분야에서 57개 주요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어떤 나라에서도 기후위기의 국내 정치경제는 국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기후위기의 원인, 과정, 결과가 국민국가의 국경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주 대산불의 직접 원인인 고온과 건조는 호주만 책임질 문제가 아니며, 호주 혼자 노력한다고 남반구 기온과 강수량, 인도양의 조류와 온도가 얼마나 달라질까. 호주의 정치경제가 설사 모든 것을 인정하고 경로를 바꾼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마치 ‘공유지의 비극’처럼 천천히 바뀔 것이다.
기후위기가 정치경제에서 떨어질 수 없는 동시에 지구적 차원의 문제 그리고 국민국가의 이해관계로는 풀 수 없는 문제라면, 그런 국민국가에 속한 호주 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그들의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한국, 한국인)의 것이기도 하다. 연결될 뿐 아니라 공유한다.
노파심에서 말하면, 그들에게 경제적 지원이 되라고 기부를 하고 정부는 국가 간에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같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보다는 보편성에 대한 것이다. 국제 정치경제에 속한 것인 한에는 그들의 과제와 실천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작년 9월 이미 다음과 같이 주장했고 제안했던바, 국제 시민사회가 당면한 공통 과제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본다. 핵심은 세계 시민과 연대하는 지식과 도덕의 새로운 정치경제를 창출하는 것 (서리풀논평 바로가기).
어떻게? 일차적으로 불평등(소득, 교육, 지역, 건강)이나 남북 평화체제 구축과 비슷한 수준으로 힘 있는 말과 상식을 만들어야 한다. 지식 권력 또는 담론 권력이라 해도 좋다. 무슨 정교한 이론과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 사회가 축적한 현실 경험과 고통이 더 큰 원천일 수 있다.
생각과 관점의 틀이 출발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모순과 불평등을 기후위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또는 그런 틀로 개혁을 상상하기. 누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믿으며 판단하는 것, 설득하고 수용하는 프레임이 있어야 힘이 생긴다.
여기서 한국 상황 몇 가지만 바꾸면 국제적 보편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