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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게 돌봄의 질에 관여할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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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경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최현숙 작가의 <작별일기>에는 86세의 엄마가 시설에 입소한 뒤 알츠하이머에 걸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일지 형태로 담겨있다. 돌봐줄 사람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노인에 비하면, 고급 실버타운에 부부가 나란히 들어가서 자녀들의 정기적인 방문과 돌봄을 받는 상황은 훨씬 나아보였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 때문에 품위와 시간을 조금 더 확보했을 뿐, 질병과 노화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 그 역시 부질없어지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닥친 운명으로 보였다.

삶을 혼자 힘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연구 과정에서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실감한 것은, 이들에게는 ‘선택’을 하고 싶어도 더 나은 대안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들여 실버타운에 들어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닌 다음에야, 미디어에서 그리 무섭게 그려지는 요양원에 들어가 ‘산송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의료에서 전문가와 환자 사이의 정보 불균형, 전문가와 기술에 대한 불확실성, 신뢰 문제가 있다면, 장기요양의 경우 의료보다는 오히려 어린이집 돌봄과 비슷한 문제가 있다. 이용자의 상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이가 많아지고 건강 상태가 악화될수록 이용자 본인이 시설의 질을 평가하기 어렵고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이 약해진다. 특히 가족 관계가 약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또한 노인이 되면 사회적 기능 뿐 아니라 신체적, 인지적 기능이 모두 저하되면서 기대 수준 자체를 조정하기 때문에 불만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거나 개선을 요구하기 어려워진다. 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떤 돌봄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은 그에 관여할 수 없다는 통제 불가능함에 부딪칠 때 절망이 된다. 나의 돌봄에 대해 주장하고 관여할 수 있는 권리는 단지 경제적 여유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만일 이것이 개인의 경제력에 좌우된다면 이 또한 불공정한 것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의료영역에서는 최근 ‘환자 중심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2017년도부터 의료기관 질 평가에 환자경험평가가 포함되었다. 이용자 중심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이다. 환자 또는 사람 중심 관점은 보건의료체계의 반응성(responsiveness) 강화부터, 스스로 받게 될 서비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리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장기요양 영역에서는 아직 이러한 관점이 부족해 보인다.

 

최근 [미국공공행정리뷰학회지]에 실린 논문은 질 높은 장기요양서비스를 위해 사람 중심 관점이 필요하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논문 바로가기: 시민참여가 미국 요양원(Nursing Homes)의 성과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 미국 요양원(nursing home)을 배경으로 한다. 연구진은 장기요양 서비스의 비용은 공적으로 충당하면서 서비스는 민간에 의해 제공된다는 점에서 책무성과 시민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요양원의 행정 관리 행태에 대한 정보는 텍사스 A&M 대학에서 수행한 서베이 자료, 연방 정부의 요양기관 성과 평가 데이터 아카이브, 그리고 지역 보건의료자원 자료를 연계했고, 2015년 서베이에 응답한 총 617개의 요양원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참여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우선 ‘낮은 수준의 참여’는 행정 방식이나 조직 운영에 실질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할 방식의 상호작용을 뜻한다. 여기에는 교육(정보 제공), 소통, 청취, 표현하기, 선호 확인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반면 ‘높은 수준의 참여’는 파트너십에 기초해 공동의 거버넌스를 수행하거나 협상, 숙의 같은 과정에 의한 공동 의사결정 요소를 포함한다. 낮은 참여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용자 집단(이용자, 가족)과 상호작용하는 빈도’를 이용했고, 높은 참여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는 ‘요양원 정책을 개정하는 데 이용자와 가족의 피드백과 의견을 반영하는 정도’를 이용했다.

요양원 성과지표는 건강 조사, 인력 활동시간, 질적 수준의 세 영역 평가를 통합한 ‘5점 만점 등급’과 일정기간 내 돌봄의 질, 삶의 질, 이용자 권리, 행정, 영양 등에서 ‘규제 항목 위반 횟수’를 활용했다. 연구진은 낮은 수준의 참여와 높은 수준의 참여 모두가 요양원의 질 향상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고자 했다. 제3의 요인에 의한 효과를 통제하기 위해 요양원의 소유 특성(영리, 비영리/공공)을 포함하여, 성과와 관련된 여러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 회귀분석을 수행했다.

 

분석 결과, 시민 참여 수준에 따라 요양원의 질 성과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상호작용’으로 표현된, 즉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받는 정도의 낮은 참여수준은 요양원의 질과 성과지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반면, 이용자와 가족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했다고 응답한,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의사결정에 유효한 피드백을 받고 반영하는 곳일수록 질과 성과지표가 높았다. 연구진은 이용자의 피드백을 그저 듣기만 하는 것보다는 의사결정 과정에 이용자들을 포함시킴으로써 이용자의 필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제공자와 이용자 간 신뢰를 형성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더 적극적이고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연구는 이용자 참여가 개별 조직 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의료와 돌봄을 포함한 보건의료체계 전체의 강화라는 관점에서 고민이 필요하다. 예컨대 커뮤니티케어에서 제공할 서비스의 과정과 질은 사람 중심 관점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치매국가책임제는 치매환자와 가족의 의견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요즘 떠오르는 디지털 돌봄 기술은 과연 사람을 중심의 관점으로 개발되고 있는가?

보통 시민참여는 충분한 사전교육과 상호작용에 의한 숙의과정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숙하고 지적, 인격적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참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가지 취약성을 지닌 이들, 특히 장기요양서비스의 주요 이용자인 노인 환자들 혹은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주체성과 권리를 부여하고 이들의 필요와 의견을 반영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의료나 돌봄 정책 전문가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 서지정보: Amirkhanyan, Anna A., et al. “Citizen Participation and Its Impact on Performance in US Nursing Homes.” The American Review of Public Administration (2019): 0275074019854172.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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