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2020년 4월 15일 수요일. 역설적인 이유로 이렇게 또박또박 적는다. ‘국회의원’ 선거라거나 ‘총선’이라거나 하는 것이 아무런 감흥도 기대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니, 일부러라도 되새겨야 할 참이다.
국회의원 선거가 무슨 뜻이 있는지, 어떻게 되어야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어떤 사람이 당선되어야 하는지, 새삼스럽게 원론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누구나 잠깐만 생각하면 다 아는 이야기에 그토록 시비가 많으니, 이미 상식이며 공감대가 튼튼하다.
막상 현실은 유체이탈이다. 선거법을 두고 사생 결단을 할 때는 이제 좀 나아질까 했더니 천만의 말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데다 피로감도 확연하다. 겉모양으로도 새로운 정치라거나 혁신, 개혁, 근본 따위의 말을 쓰지 않는다.
첫째, 비전과 목표가 사라졌다. 최소한도 찾기 어렵다. 긴 시간 숱한 실망과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래도 정치는 희망을 말하고 미래를 따지는 인간 활동이다. ‘총선거’라면 어떤 사회, 어떤 나라, 어떤 정치 공동체, 어떤 국회, 어떤 개혁을 말해야 마땅하다. 학습효과인지 지쳤는지 아니면 실용인지,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지금 모든 것이 잘 돌아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터, 가장 중요하게는 이 시대에 정당과 정치인이 그런 것으로 당선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아서(또는 그렇게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그들은 평화체제 구축, 온갖 불평등의 완화, 정의와 공정성 같은 약속은 공허한 것으로 치부한다. 기후위기, 고령 사회의 새로운 삶의 양식, 경제 민주주의, 대안적 젠더 레짐이야 엄두도 내지 않는다.
정치의 책임이 가장 무거운 대목이다. 지역 일꾼을 뽑는다며 ‘국회(國會)’를 배신할 것인가. 모두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라고 할 때, 스스로 “내 코가 석 자”라는 생각이 들 때, 미래와 희망과 비전은 누가 말해야 하나.
둘째, 국가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묵묵부답이다. 다른 나라 뉴스로나 볼 수 있는 ‘그린 뉴딜’이나 ‘웰빙 예산’은 바라지도 않는다 (기사 바로가기). 브렉시트와 국가공영의료체계(NHS)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영국 총선이 부러울 지경이다 (기사 바로가기). 서로 다른 정책과 방법을 경쟁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정당들이 앞다투어 공약을 발표한다고 하지만, 말만 ‘공약(公約)’이지 아무리 뜯어봐도 ‘미끼 상품’ 아니면 민원 해결용이다. 단발성에 선정성, 뜬금없는 탈-맥락과 탈-구조라니, 유권자가 오히려 정당을 걱정해야 하나. 집권 여당이 내놓은 첫 번째 공약, 전국에 무료 와이파이를 확대하겠다는 약속이 이 모두를 상징한다.
집권 여당이라면 아무리 곤란해도 최저임금, 국민연금, 증세와 재정 확대에 대해서는 뭐라도 약속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임기라고 해야 4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사이에도 진행형, 노인 빈곤, 지방 위축, 보육과 돌봄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국회와 정당이 해야 할 일과 약속이 이 모양이니, 이제 선거에 돌입하면 필시 민원성 지역 공약이 모든 것을 압도할 것이다. 대기업 유치, 철도와 공항, 큰 병원과 의과대학, 그리고 바이오, 혁신, 제4차 산업혁명, 디지털 등등으로 시작하는 온갖 종류의 경제적 가상들. 공약(公約)은커녕 공약(空約)도 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셋째, 정치적 실천의 한 주체로서 어떤 정치인을 대표로 뽑을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한국 선거의 고질적 병폐인 공천은 더 말할 것도 없으니, 학살이니 반란이니 전쟁 용어까지 동원해도 ‘민주적 공공성’과는 거리가 먼 패거리 게임이다.
때맞추어 되풀이되는 정치 신인이니 영입이니 하는 이벤트도 지겹다. 대중매체의 작법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보이는 것은 전부 연예형, 오디션형, 인간극장 스타일이 아닌가. 국회의원의 주된 역할인 현실 정치와 정책, 입법에 어떤 전문성이 있는지,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와 대안이 있는지, 아예 관심도 없다.
‘대표성’이 가장 아프고 취약하다. 지역 대표성이 압도하는 대의 구조와 이벤트형 정치인 충원이 당장 문제지만, 지역과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메커니즘인 참여는 말만 무성한 채 감감무소식이다. 누가 ‘우리’를 대표하고 관심과 이해를 대변한단 말인가? 여러 불리한 사람은 무엇에 기대해야 하나?
요컨대 적어도 이런 세 가지 이상의 한계 속에서 치러질 총선 결과는 뻔하다. 우리는 어느 정당이 다수당이 되더라도 이 국회 정치는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비관한다. 누가 국회의장을 하고 어떤 법이 좀 더 쉽게 통과될 것인지는 작은 변화라도 있겠지만, 불평등, 지역 소멸, 노인 빈곤, 의료와 돌봄의 공공성은 그냥 그대로, 보수(保守)로 시종하리라 생각한다.
오십 걸음과 백 걸음은 다르다고? 당연히 그러하고, 우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차이는 겉모습, 이벤트, 스타일, 분위기, 말 따위보다 사람들의 삶, 그 실질적 변화에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관심을 두고 문제로 삼는 것도 바로 그것으로, 현재 상태 그대로 다른 변화 없이는 큰 걸음 차이가 나지 않으리라 전망한다.
최근 벌어진 일 한 가지가 교훈이자 이런 판단의 근거이다(유일한 근거가 아니니, 미루어 짐작하거나 검색해보라). 21대 국회라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개인정보 보호법」 등 일명 ‘데이터 3법’이 2020. 1. 9.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정보인권에 대한 보호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 법률 개정이 이루어진 데 대해서 우려를 표합니다. (인권위원회 보도자료 바로가기)
그때 그 와중에 여야가 합심해 법을 통과시킬 때 이런 일이 먼저 있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한 언론사 주최 토론회에서 기업들과 둘러앉아 ‘데이터 3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모처럼 여당과 제1야당이 ‘정쟁보다 미래를 보자’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한 가운데...(기사 바로가기)
홍 원내대표는…“빅데이터 경제3법은 4차 산업혁명 대비와 더불어 정부의 혁신 성장에 꼭 필요한 법”이라면서 “부처 간, 시민단체와 업계 간 조율이 마무리돼 입법 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기사 바로가기)
오래 묵고 구조적 문제라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점이 더 비관적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헛된 희망을 키울 수야 없으니, 이럴 때는 더 철저하게 비관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싶다. 다만, 그 전제는 비관의 형편과 그 근거를 제대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런 사정조차 틈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