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우리들의 일과 벤조다이아제핀의 숨겨진 고리

1,381회 조회됨

 

류한소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얼마 전 함께 연구를 하는 동료들과 한 증권회사 직원을 만난 적이 있다. 노동자 정신건강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했더니 그는 대뜸 “아마 제정신인 사람이 없을 걸요? 영업직원들은 제정신일 수가 없어요. 감정의 기복이 심해요. 우리끼리는 ‘뽕 맞는다’란 표현을 쓰죠”라며 자신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달에 20일 이상 술을 마신다는 말과 함께.

과중한 노동, 낮은 보상 등으로 초래된 업무 스트레스가 여러 경로를 통해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기존 연구들은 특히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일수록 술, 담배, 대마초(합법화된 나라의 경우), 항정신성 약물을 많이 복용한다고 보고해 왔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약물의 부작용이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건강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제 학술지 <미국공중보건학회지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에 실린 프랑스 연구팀의 논문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스트레스 상황에 많이 노출되는 노동자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벤조다이아제핀 장기 복용의 위험이 남성은 2.2배, 여성은 1.6배 높게 나타난다고 보고했다 (☞논문 바로가기: 일과 관련한 스트레스 요인과 벤조다이아제핀 장기 복용 위험의 증가: CONSTANCES 인구 기반 코호트 조사를 통한 발견).

벤조다이아제핀 계열 약물은 불안상태와 수면장애 치료에 널리 사용되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의약품 중 하나이다. 예컨대 벤조다이아제핀계 약물 중 하나인 알프라졸람(alprazolam)은 2013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처방된 약이었고, 2012년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17%가 최소 한 번 이상 이 계열의 약물을 처방 받았다. 벤조다이아제핀은 권고되는 단기 처방을 넘어 장기 처방도 자주 이루어지는 편이다. 1991년~2009년 동안 영국에서 이루어진 전체 벤조다이아제핀 처방 중 약 2/3에 달하는 사례가 부적절 처방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고 한다. 벤조다이아제핀계 약물의 장기 복용은 여러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약물 의존성은 물론, 잠재적으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부작용들, 예를 들어 낙상, 자동차 사고, 호흡기능 상실, 암, 자살 충동 등이 그것이다.

 

연구팀은 2009~2014년 프랑스 주요 지역의 22개 건강검진센터에서 18세~69세 연령군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보험급여약물 데이터베이스와의 연계하여 벤조다이아제핀 장기 복용 여부를 확인했다. 조사 참여자들에게 평소 일터에서 “사람들을 상대할 때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 처해 있나요?”라고 질문하고, ① 전혀 또는 거의 전혀 아니다, ② 가끔, ③ 종종, ④ 항상 또는 거의 항상 중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보험급여약물 데이터베이스에서는 클로나제팜(clonazepam), 클로르디아제폭사이드(chlordiazepoxide), 옥사제팜(oxazepam) 등 총 12개의 벤조다이아제핀 계열 처방량을 확인했다. 연속 처방 기간이 프랑스에서 허가된 최대 복용 기간 12주보다 더 긴 경우를 약물 의존 등의 부작용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 장기복용으로 간주했다.

 

분석 결과, 연구 참여자 33,195 중에서 306명의 남성(2%)과 624명의 여성(3%)이 벤조다이아제핀을 장기복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녀 모두에서 연령이 높을수록, 직업적 지위가 낮을수록 (예컨대 고위 임원에 비해 판매원, 농부, 블루칼라 노동자, 기능직인 경우), 직무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보상이 적다고 느낄수록, 우울증상이 있을수록, 알코올 문제가 있을수록, 나쁜 건강상태라고 느낄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장기 복용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여성의 경우, 사회경제적 수준이 낮은 지역에 거주할수록 장기 복용의 위험이 높았다.

이러한 개인적 또는 환경적 취약 요인을 통제했을 때, 남녀 모두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 많이 노출될수록 장기복용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트레스 상황에 가끔 또는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들에 비해 종종 또는 항상 노출된다고 답한 사람들의 경우, 남성은 2.2배, 여성은 1.6배 벤조다이아제핀 장기 복용 위험이 높게 나타났다. 선행 연구결과에 의하면, 벤조다이아제핀 복용은 직장에서 감정을 숨기거나 기분이 좋은 척 하려는 경향과 관련 있었다. 연구팀은 이러한 결과가 업무과정에서 만성적으로 노출된 스트레스 환경이 주는 괴로움과 불안을 스스로 감당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고 해석했다.

 

국내에서는 2007~2011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 분석 결과, 수면내시경용 처방을 제외했을 때 18세 이상 인구 중 23.7%가 연간 1일 이상 벤조다이아제핀계 약물을 처방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연구보고서 바로가기: 벤조다이아제핀 계열 약물의 처방양상 및 안전성). 오늘 소개한 프랑스 연구결과와 바로 대비시키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한국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이 약물을 처방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년에 30일 이상 처방받은 사람들도 7.9%나 되며, 90일 혹은 180일 이상의 처방도 각각 4.7%와 3.2%를 차지했다. 한국에서의 처방 양상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환자들의 주상병 또는 부상병은 위·십이지장 질환(29.8%), 불안장애(12.4%), 수면장애(10.8%) 순으로 나타났고, 남성(35.1%)보다는 여성(64.9%)이 비중이 두 배 가까이 많다. 연령군 분포를 살펴보면, 60대(22.7%), 50대(20.3%), 70대(19.1%) 순으로 노인 연령대의 처방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한편 벤조다이아제핀계 약물 처방의 80%가 정신과 이외의 임상과에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여, 각 연령대별로 총 처방 명세서 중 정신과 처방의 빈도를 살펴보면, 18-30세(30.4%), 30대(28.3%), 40대(21.6%) 순으로 비중이 컸다.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에서 정신과 처방을 빈번하게 받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처방 양상은 우리들의 일하는 삶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앞서 말했던 그 증권회사 노동자는 동료가 자살했을 때 산재 신청을 위해 업무 연관성을 보여줄 만한 자료를 찾아보려 책상을 뒤졌지만 유서는커녕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동료는 평소에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고 한다. 향정신성 약물의 소비 데이터에 어떤 노동과 삶의 진실이 숨겨져 있을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끝)

 

* 서지정보

Guillaume Airagnes, Cédric Lemogne, Romain Olekhnovitch, et al. Work-Related Stressors and Increased Risk of Benzodiazepine Long-Term Use: Findings From the CONSTANCES Population-Based Cohort. American J Public Health 2019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시민건강연구소 정기 후원을 하기 어려운 분들도 소액 결제로 일시 후원이 가능합니다.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