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시민이 ‘한국판 뉴딜’을 새로 만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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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말도 알아듣기 어렵다. 뉴딜?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그린 뉴딜은 무엇이고 디지털 뉴딜은 무엇인가? 지난주 경제부총리가 방송에 나와 현란한(!) 그림으로 발표를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보도자료 바로가기).

의도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내용은 알거나 기억하지 말고, 그냥 막연한 인상만 남기를. 코로나19로 촉발된 위기에 그래도 정부가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뭔가 열심히 하는구나, 이번 기회에 정말 근본적으로 뭘 바꾸려고 하나? 이런 인상 또는 이미지를 전달하려고 한 기획일까.

한 화면에 이런 말(또는 기호)이 동시에 등장해서 어지러웠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BC, AD, GVC, ICT, O2O 같은 말을 얼마나 알아봤을까. 한글로 쓰였으나 한글이라 할 수 없는 ‘미스매치’나 ‘바이오헬스’도 함께였다. 겉으로야 한국말처럼 보이는 ‘저탄소경제’는 또 어떤가.

 

 

이 정도면 누가 보고 알아들으라고, 또는 알아보지 말라고 이런 행사를 기획하고 자료를 준비했는지 해석이 필요하다. ‘국민보고대회’의 그 국민이 누구인지 묻는 것은 부질없다. 구체적인 내용도 덜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 의도를 담은 일종의 정치적 기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당사자가 인식했는지 그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익숙한 습관 또는 무의식이라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두 가지 의도란,

 

첫째, 정치적 책임에 대한 (관료주의적) 응답.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니 어떤 국가권력과 정부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코로나19와 그 이후에 대한 대응과 계획을 말해야 이 권력과 정부가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합법성이나 진실성이 아닌 정당성!).

보고 듣는 사람들이 내용을 잘 이해하면 오히려 정당성을 의심받을지 모른다는 것이 요점이다. 뭔가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잖아, 저게 되겠어? 이렇게 되면 정당성 기획은 필시 실패한다. ‘보고’는 가능하면 모호하게 두루뭉술 지나가고, 일이 끝난 뒤에 해석과 해명이 난무하는 쪽이 오히려 성공적이다.

 

두 번째 의도(정치적 기획)는 평범하게 말하면 ‘굳히기’요 심하게 말하면 ‘재난 자본주의’를 밀고 가는 것이다. 그동안 하고 싶었으나 실패했던 것을 코로나19 위기를 핑계 삼아 다시 꺼내 힘을 붙이는 작업이자 일종의 편승 전략이다.

이는 바로 얼마 전 원격의료 논의에서 확인했으니 새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논평 바로가기). 다만, 재난 자본주의의 핵심 원리가 ‘쇼크 독트린’인 것을 잊지 말자(기사 바로가기).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뉴노멀’을 이야기하고 그중에서도 힘센 나라들이 ‘뉴딜’로 격론을 벌이는 중이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모두가 ‘쇼크’를 각오하고 있는 때.

 

정치적 기획이 이렇다면 그 결과, 내용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지난 10년 아니 20년간 그 다양한 이름으로 발표한 비슷한 내용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기사 바로가기). 신성장동력, 녹색성장, 창조경제, 혁신 성장, 그리고 다시 한국판 뉴딜. 문패만 바꿔 단 셈이니 시민의 반응은 이 때문에도 ‘악플’보다는 대체로 ‘무플’이다.

 

우리도 새로 보탤 말이 많지 않다. 의료관광, 의료산업화, 영리병원, 경제특구, 규제 혁신, 바이오신약, 제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인공지능, 스마트 의료, 원격의료 등등 그 긴 족보에 다시 한 줄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언컨대 새로운 가치, 이에 대한 근거와 논리는 없다(기사 바로가기). 코로나19라는 쇼크에 묻어가는 전형적인 재난 자본주의의 얄팍한 기획이다.

 

다만, 한 가지 더할 말은 ‘뉴딜’의 그 ‘딜’에 대한 것이다. 정부는 발표자료에서 이 딜을 (문법도 맞지 않게) “변화와 미래 대비하는 국가발전전략”이라 표현하고 ‘약속’이라고 정의했다. 한국판 뉴딜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약속한다는 뜻인가? 나는 무엇을 약속해야 하는가?

 

딜을 약속으로 정의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딱 정확하지도 않다. 여러 영어 사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정의는 약속이라기보다는 협약, 동의, 합의 등에 가깝다. 관계이고 상호성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힘겨루기이자 (불)평등의 문제다.

 

우리의 경험에서 유사 사례를 찾으면, 지금도 쓰이고 동원되는 바로 그 말썽 많은 ‘사회적 합의’가 딜의 한 가지 형태다. 한국판 뉴딜도 이러한 딜의 본질을 피할 수 없으니, 그 모순과 갈등은 애써 숨겨도 저절로 드러난다.

 

한 걸음만 들어가도 ‘딜’해야 할 것이 넘쳐난다. 노동의 쏠림과 감소 앞에 기업과 정부와 노동자가 감당할 부담을 어떻게 나눌까? 녹색 전환을 위해 좌초할 것들을 위한 대안은 뭘까? 데이터 경제와 정보인권 사이 절충점은 있을까?… 하나같이 까다롭다.(기사 바로가기)

 

합의에 치우치느라 소홀히 한 것, 그 상호관계가 더 중요하다. ‘오리지날’ 뉴딜도 그랬지만(자료1 바로가기, 자료2 바로가기), 한국판 뉴딜 또한 평평하고 납작한 ‘분담’이나 ‘절충’이 될 수 없다. 더는 내놓을 것이 없는 쪽, 그리고 아무것도 내놓을 필요가 없는 쪽, 그 사이에서 합의란 ‘강요된 합의’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한국판 뉴딜도 온갖 종류의 구조 개편을 말하는바, 필시 승자와 패자를 낳고 부담과 이익을 불평등하게 배분한다. 이번 계획도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 경제에 대한 꿈을 제시했지만, (그곳까지 간다고 치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빚어지는 취약함, 고통, 위축과 소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안정된 일자리는 어디에서 얼마나 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더 많은 이익과 소득은 어떻게 배분되는가?

 

뉴딜의 한 요소로 ‘사회 안전망 강화’가 포함되어 있지만, 또한 우리는 왜 이것이 안전망이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왜 추락하고 추방된 이후에야 최소한 안전해야 하는가, 안전망이 아니라 떨어지거나 쫓겨나기 전에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제 도덕과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권력 관계와 정치의 문제다.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은 내용(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권력이 치우쳐 있다. 대부분 정책이 대동소이, 서민과 약자가 내놓을 것은 ‘현금’인데 기껏 얻을 것은 ‘약속어음’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는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데 상병 수당 도입은 내년에 용역연구를 하고 2022년에야 저소득층 대상 시범사업을 하겠단다.

 

이중의 권력 관계라 할까, 지금 제대로 딜을 할만한 권력이 없는 것이 이런 결과를 빚어냈다. 정확하게는 권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 모이고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현재 상태다. 한국판 뉴딜을 준비하면서 정부는 누가 가진 어떤 힘에 압박이나 부담을 느꼈을까?

 

약자가 권력을 드러내고 만드는 일, 그 힘의 원천은 몸과 말이다. 코로나19 유행이 드러낸 죽음, 아픔, 고통, 불안이 (역설적으로) 권력의 원천이며, 오로지 함께 이를 증언하고 말하며 요구해야 사회적 권력이 조직된다. 이로써 대항이자 대안으로 시민이 제안하는 뉴딜을 강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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