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로라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새로운 보건의료기술들이 끊임없이 우리 삶에 걸어 들어오고 있다. 작년 말, 정부는 인공지능과 3D 프린팅 의료기술의 급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건강보험 급여화의 문을 열었다(☞ 혁신적 의료기술의 요양급여 여부 평가 가이드라인). 한 해 수백, 수천 건의 로봇수술 성공 기록은 환자유치를 위한 병원의 홍보 전략에 널리 쓰이고 있다(예: 부산대학교병원, 로봇수술 1500예 달성, 세계 첫 다빈치 SP로봇수술 1000례 달성한 세브란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실시간으로 걸음 수, 수면 시간, 식단, 체지방 정보를 수집, 분석해 준다는 건강관리 앱들이 넘쳐난다.
이러한 의료기술의 도입과 확산 덕택에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지고 있을까?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답은 아직 모른다. 빠른 시장 진입을 위해 기술평가과정들이 점점 더 간소화되는 가운데, 새롭게 도입되는 많은 의료기술들이 유의미한 건강 개선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기존의 불평등을 악화시킬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의료기술이 건강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은 기술 도입이나 사후평가 과정에서 좀처럼 검토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우려스럽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의료기술이 건강 불평등을 초래하는 기전을 탐색하고 있다. (☞ 논문 바로가기: 계층화된 사용자와 역량강화의 기술 – 당뇨병 자기관리 기술의 활용과 인식에서 나타나는 사회불평등의 이론화). 국제학술지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2월호에 실린 이 논문은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한다. 노르웨이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 기반의 보건의료체계를 갖춘 곳으로 공적 지출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전체 보건의료비에서 공공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85.4%로 OECD 국가 중 1등이며 한국의 60.8%를 크게 상회한다. 논문은 이런 노르웨이의 보건의료체계 속에서 사회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의료기술에서조차도 기술사용과 인식 과정에 불평등이 나타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구진이 주목한 기술은 당뇨병의 자가관리를 돕기 위해 개발된 연속혈당측정기(CGM)와 인슐린자동주입기였다. 제1형 당뇨 환자들은 췌장에서 인슐린을 분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체내에 주기적으로 인슐린을 주입해야 한다. 이전에는 채혈침, 인슐린 주사 등을 사용했지만, 매번 채혈을 하고 주사를 투여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 컸다. 그런데 연속혈당측정기는 피부 아래 센서를 주입하여 반복적 채혈 없이도 혈당 수치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할 수 있는 장치이다. 인슐린자동주입기도 환자의 피부 아래 카데터를 삽입하여 체내에 인슐린을 자동 공급해주는 기기로, 이 두 가지는 보통 함께 사용된다.
연구진은 2018년 가을과 겨울, 총 24명의 제1형 당뇨 환자들을 대상으로 심층 면담을 진행했다. 면담 참여자는 젠더, 학력, 연령, 질병 이력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면담 질문은 평소에 당뇨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의료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시간의 경과와 기술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당뇨관리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이었다. 당뇨 치료 기술에 대한 맥락적 정보를 파악할 목적으로 연구진은 환자 집단 이외에도 5명의 당뇨 전문의와 3명의 간호사를 추가 면담했다.
심층 면담 내용을 분석한 결과, 당뇨관리를 위해 도입된 신의료기술의 사용과 인식에서 세 가지 사용자 유형을 구분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유형은 ‘적극적 사용자’로 새로운 의료기기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정밀하게 관리하고 질병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는 유형이었다. 예컨대 과학자 마크(38세)는 음식의 종류, 음식을 먹는 순서의 변화에 따라 당 수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연속혈당측정기로 계속 실험하면서 자신만의 당뇨 관리 노하우를 쌓았다. 그런가 하면, IT 기술자인 크렉(30세)은 노르웨이 정부가 제공하는 인슐린자동주입기에 시중에 판매되는 혈당 모니터링 기기와 무선 송신기를 연결하여 자신만의 당뇨관리체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그룹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남성들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특성, 기술적 유능함과 문해력은 기술사용에 상당한 유리함을 더해 주었다. 이들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질병 통제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기술을 통해 이를 한층 더 강화했다. 또한 기술은 그들을 다른 환자 집단과 구분시키는 ‘상징적 자원’으로 작동하며 사회 계층화를 조장하는 측면도 드러내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이걸 쓰는 사람이 아마 1,000명에서 1,500명 정도뿐일 거예요. 많지 않아요. 이걸 쓰려면 지식이 좀 필요하고, 스스로 조립이 가능해야 해요. (크렉, IT 기술자, 30세, 남성)”
두 번째 유형은 ‘수동적 사용자’로 기술을 통해 질병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려 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많은 질병관리업무를 기술에 위임하고자 하는 유형이었다. 이들은 당뇨 관리를 불편하고, 지겹고, 힘든 일로 묘사했고 당뇨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삶, 궁극적으로는 당뇨관리의 완전한 자동화를 추구했다. 복잡하고 많은 일들을 위임하고 분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기술은 유익했지만, 동시에 강한 기술 의존성은 기기가 고장났을 때 극심한 불안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집단은 첫 번째 유형과 달리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즉, 기술이 유도하는 행동 중 개인의 노력과 역량이 상당히 요구되는 것들을 거부했다. 이런 까닭에 종종 섭취한 음식의 탄수화물 양을 제대로 입력하지 않는 등 기술사용에 필요한 행동을 잘 따르지 않고 정해진 용도와 다르게 오용하는 모습들도 포착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반항적 사용자’ 집단이다. 이들은 의료기기의 알람을 무시하거나 기기 사용 중에 느낀 좌절감 때문에 기기를 벽에 던져버리는 등 갈등, 균열, 거부를 보였다. 이 유형은 더 발전된 형태의 신의료기술을 거부하고 오래된 과거의 기술로 회귀했다. 그들에게 기술은 삶을 윤택하게 하기보다 제약하는 것이었으며, 앞서의 사용자 유형과 다르게 기술의 의미를 구성했다. 예컨대 58세 여성 줄리아와의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기술이 어떻게 이상하게 여겨지고 겁을 주며 낙인을 조장하는 물건으로 인식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을 먹으려고 할 때마다 매번 5분가량 그것을 입력해야 하는데 … 그게 너무 힘들죠. 다른 해야 할 일들도 있는데 말이예요. 잠깐은 괜찮지만 저는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 너무 많은 일이죠. 복잡하고. 그리고 그게 내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줄리아, 장애가 있음, 58세, 여성)”
연구진은 줄리아와의 대화에 잦은 끊김과 반복이 있었는데, 이는 기술에 대해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기술은 그것이 유도하는 행동을 따르지 못하는 저학력에 장애를 가진 노년기 여성을 고등교육을 받은 적극적 남성 사용자와 정반대에 위치시켰다. 당뇨 관리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한 의료기술 그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수치와 좌절의 근원이었다.
연구진은 당뇨병 관리 사례를 통해 의료기술이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전혀 다르게 구성된다는 점을 드러냈다. 물론 이러한 연구 결과가 그리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새로운 기술로부터 기대 이상의 편익을 얻어내는 일군의 능력자들과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좌절과 모멸감, 수치심을 느끼는 낙오자들에 이르기까지, 기술사용에서 계층화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논문의 저자들은 보건의료기술이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와 필요를 반영하여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불평등을 조장하는 기술의 특성에는 그 기술을 출현시킨 사회의 규범이 구현되어 있다. 예를 들어 생체정보를 정밀 분석한 결과를 제공해서 환자의 치료 의사결정을 돕는 연속혈당측정기 같은 기술에는 소비자 선택, 환자 역량강화, 개인 책임 등의 가치가 이미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발하고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는 기술의 면면들, 그런 기술에 의해 유도되는 사고와 행동 유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효율성과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보건의료체계 속에서 최신 의료기술들은 그와 동일한 논리로 환자들을 보상하거나 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올해 초부터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펌프가 건강보험 적용을 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비용 장벽은 어느 정도 낮아졌지만, 사용과 인식의 차원에서 불평등은 아직 고려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른 치료격차는 여전하거나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이미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서 기술이 저절로 평등하게 작용할 가능성은 낮다. 기술이 가져올 특권과 불이익의 다양한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 서지정보
Øversveen, E. (2020). Stratified users and technologies of empowerment: theorising social inequalities in the use and perception of diabetes self‐management technologies. Sociology of Health & Illness, 42(4), 862-876.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