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언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기술이나 치료법을 소개하지만,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나 건강불평등, 저항적 건강담론에 대한 연구결과들은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수요일,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논문, 혹은 논쟁적 주제를 다룬 논문을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흔히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제안 부탁 드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연구논문 추천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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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엄마는 미스 김이 아니다>
– Rose J et al (2013). Women and part-time employment: Easing or squeezing time pressure? Journal of Sociology 49(1). –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가 등장했다. 창조경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박근혜 정부가 고용률 70%, 근무시간 단축을 달성하고자 꺼내든 카드다. 일자리가 늘어난다니 우선 반갑기는 하다. 노동시간이 짧은 사람의 숫자가 늘어날 터이니, 악명 높던 최장노동시간 기록도 조금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시간제 일자리 도입이 일자리 통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건강에도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시간제 일자리는 단순히 시간’만’ 짧은, 괜찮은 일자리인 것일까?
마침 사회학 저널 (Journal of Sociology) 최근호에 여성의 시간제 일자리 (part-time employment)를 주제로 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연구는 호주의 성인 약 3천 명을 대상으로 일자리 종류와 삶의 질의 관계를 조사한 2006년 서베이 자료를 사용했다. 호주 또한 여성의 고용률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 35시간 이하의 시간제 일자리를 장려한 바 있다. 2008년 현재,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의 63%가 유급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 중 60%는 시간제로 일한다. 여성들은 출산 전후로 경력 단절의 위기, 직장과 가정 사이의 선택/갈등을 흔히 경험한다. 호주 사회에서도 전일제가 아닌 시간제 노동이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 연구는 주간 근무시간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전일제, 30-34시간의 시간제, 15-29시간의 시간제, 14시간 미만의 시간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 종합적인 측면에서 삶의 질을 ‘시간적 압박 (time pressure)’의 정도로 측정했다. 개인들이 생활에서 얼마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지를 9점 척도로 평가한 것이다. 근무시간이 짧아진다면 시간압박과 관련된 스트레스도 당연히 줄어들 것이라고 가정했다.
전반적인 연구 결과는 기대와 다르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 모두, 주간 근무시간이 짧을수록 직장에서, 그리고 종합적 측면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답하는 사람의 비중이 높아졌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가정에서의 시간적 압박이었다. 여성들은 유급노동을 하지 않든, 시간제로 일하든, 전일제로 일하든, 가정에서의 시간적 압박에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근무시간 단축이 가정에서의 시간적 스트레스를 완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남성들은 유급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경우보다 전일제로 근무하는 경우에 오히려 가정에서의 시간적 스트레스가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들은 유급노동 덕분에 가사노동에 대해 ‘유예’를 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논문의 저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두고 직장에서의 여성 ‘해방’, 즉 노동시간의 단축이 가정 영역에서 가사노동 증가로 전환되었다고 해석했다.
즉, 이 연구는 직장에서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제일자리는 우리가 채택할 수 있는 여러 정책수단들 중에서 효과가 불분명한 한 가지 옵션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노동자들의 경력단절이 걱정된다면 육아휴직을 보장하고, OECD 평균을 한참이나 웃도는 장시간근로가 걱정된다면 법정 근로시간을 지키도록 하면 될 일이다. 모두 현행 근로기준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다.
오히려 시간제 일자리를 비롯한 비정규일자리, 불안정고용이야말로 육아휴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저임금 때문에 혹은 일자리 불안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원흉이다. 비정규직, 불안정고용이 노동자의 건강과 안녕에 해롭다는 것은 이미 국내외 많은 논문들이 입증한 바 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가 아니라 정규직 일자리와 근로기준법 준수가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