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행정법원은 학원·독서실·스터디카페 등 3종 시설에 대한 방역패스 적용에 대해 본안 판결 시까지 집행정지명령을 내렸다. 방역패스가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주장과 개인의 생명과 안전 보호라는 공익을 위한 불가피한 측면이라는 주장이 맞서는 모양이다.
방역패스가 유행을 억제하는 데 보건학적 타당성이 있는지는 여기서 따지지 않는다. “공공규칙을 통한 이득을 누리기 위해서는 누구나 공정한 부담을 져야 한다”라는 정의 원칙에 부합하는지, “기본권 제한 심사에서 공익에 해당해, 기본권 제한으로 기대되는 법익이 균형을 이루는지”도 오늘 논의에서 제외한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은, 코로나19 유행 기간 (어린이를 포함한) 청소년 시민의 참여권이 철저하게 무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의사결정과 정책 집행 과정에서 배제되었으며, ‘학원, 독서실, 스터디카페 등에 대한 방역패스 적용 집행정지’ 결정에서도 어린이/청소년의 참여는 없었다. 의견을 묻지 않으니 방역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결정에 참여할 공간도 존재하기 어렵다.
당사자로서 어린이/청소년을 배제하는 것은 ‘자연화’된 것처럼 보인다. 익숙한 관료주의적 ‘일 처리’가 전부다. 학교가 문을 닫을 때 의견을 묻지 않고, 그들의 가정환경 또는 가정 밖 상황도 관심 밖이다. 어떤 효과적인 대책이 있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당사자는 그저 따라야 하는 수동적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백신 접종을 할 때 또한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묻는 과정은 턱없이 소홀하다.
한 가지 더, 어린이/청소년끼리도 불평등이 심각하다. 누구에게 백신을 접종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 학교 밖, 가정 밖 청소년은 고려 사항에 없다. 교육부에 속한 사람들만 백신 우선 접종자에 해당하고, 가정 밖 청소년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직종 종사자는 그대로 위험에 노출된다. 이른바 ‘배제’라는 반(反)-민주주의.
참여와 민주주의를 말하는 이유는 ‘실무적’이기도 하다. 어떤 구성원들이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특정 집단이 배제되면 그들의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커진다. 누구라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이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에 기초해 논의한 다음 결정해야 다들 합리적이라 받아들이고 공평하게 부담할 결의가 생긴다.
물론 하루아침에 개인이 역량을 키우고 참여가 가능한 토대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따져보자, 어린이/청소년의 참여권이 생전 처음 나오는 이야기인가? 이미 많은 지자체가 ‘어린이청소년참여위원회’를 운영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서울청소년정책참여포털’이라는 누리집을 방문해보시기 바란다(바로가기). 차마 아무 토대와 실마리가 없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19 방역 과정에서 이런 참여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으니 토대가 튼튼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이 또 다른 기회인 것도 분명하니, 도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저런 전시성 사업에 앞서 이들을 참여와 의사결정의 주체, 시민으로 인정하는 것이 급선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들이 시민적 주체라고 관점과 인식을 바꾸는 것이 관건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린이/청소년 시민이 자신의 정치적 공간에서부터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고, 선거를 비롯한 공적 정치 과정에도 쉽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청소년을 하나의 집단, ‘학생’으로 단정 짓지 말고 다양한 계층과 상황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토대 다지기가 중요하지만, 그냥 천천히 장기과제로 할 일이 아니다. 어린이/청소년을 대신한 의사결정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당사자에게 해로울 수도 있다. 참여가 없고 배제적인 방역지침을 보고, 2014년의 “가만히 있으라”의 참사를 떠올리거나, 일상, 식사, 관계망 등 모든 삶이 강제되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 이들도 있다(인권교육센터 들·청소년인권운동연대. 2021. 코로나19시대, 청소년인권을 다시 묻다. 바로보기). 소외된 코로나 세대로, 우울과 불안이 지속되어 두고두고 상처를 남길까 걱정스럽다.
다시, 많은 이들이 어린이/청소년의 의견과 주장을 모르는 것은 이들이 할 이야기가 없거나 어른들과 의견이 같아서가 아니다. 불평등한 권력관계, 공적 참여 구조(어린이/청소년 위원회)의 위상이 낮고 정치적, 사회적 대표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권리가 있으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태, 부인하기 어려운 우리의 인권 상황이자 민주주의의 수준이다.
앞서 인용한 청소년 인권운동을 보더라도, 아주 늦지는 않았다. 먼저, 그동안 축적한 사회적 기반을 활용하는 데서 출발하자. 실제로, 청소년 위원회 한 참여자는 위드코로나 시대에 대면 활동을 정상화해달라고 요구했으나(2021년 제6대 서울특별시 청소년의회 본회의 바로보기), 그 위원회를 벗어나서는 누구도 듣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이 병목을 없애는 어린이/청소년 ‘인권 정치’가 길을 열 것으로 믿는다.
백신 패스 문제를 두고 정부도 방역 당국도 곤혹스러운 점이 있을 줄 안다. 그 정책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는 간단하다. 왜 이들의 의견과 주장을 듣지 않는가? 참여와 민주주의가 의사결정의 ‘품질’을 높인다는 것이 현대 정책의 ‘원론’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