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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토대를 넓히고 두텁게 만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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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이 ‘출근길 지하철 탑시다’ 에서 4월 20일을 기한으로 한 ‘삭발투쟁’ 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장연은 한국 사회의 여러 장애인 조직들 중에서도 최중증장애인들과 함께 장애인차별철폐를 외치고 장애인 권리보장 투쟁을 하는 ‘스트리트 레벨’의 운동단체이다. (단체 활동가는 전장연을 마이너리그라고 한다면, 정부예산을 받아 법제화된 장애인정책을 집행하고 장애계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내는 여의도에 있는 법정단체들이 메이저리그쯤 된다고 했다)

 

전장연에는 회원 단체가 10개 정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학교 갈 기회가 박탈된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노들야학이다. 코로나19 판데믹이 시작되어 모두가 위축되고 불안해하던 2020년 봄, 노들야학은 장애인평생교육법상 예산 코드가 없는 곳이라 하여 교육청에서 방역도 안 해주던 곳이다. 효과가 없다는데도 불구하고 유명 정치인들이 길거리에 소독약을 뿌리고 다니던 그 시간에도 말이다!

 

2주 전 우리의 논평이 나간 이후로도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의 ‘반문명적인’ 발언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전장연은 현안에 대한 조건 없는 100분 토론을 제안했고 이 대표는 호기롭게 무제한 토론으로 응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며칠 후 돌연 “일정상 불가능하다”면서 일방적으로 토론회 연기를 통보했다. 그의 발언들이 혐오와 갈라치기 정치를 위한 잘못된 주장이란 여론이 높아지고 있던 중이었다.

 

그에 앞서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경복궁역에서 집회 중인 전장연을 방문하여 “이 대표 발언의 영향력을 살펴보겠다” 한 것을 두고, 이준석 대표는 인권위가 “아무데나 ‘혐오’ 딱지를 붙인다”며 공개비판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행정, 입법, 사법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국가기구이다.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조치를 할 수 있고, 국제인권규범을 국내에서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인권전담기구이다. 국회, 대통령,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11명의 인권위원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위상과 처분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모적이고 유해한 논란을 유발한 당사자이자 유력 정치인으로서 이 대표의 반응은 인권위가 본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존중하는 태도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이 대표의 토론회에 대한 일방적인 연기 통보나 인권위에 대한 폄훼적 발언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빈약한 인권의 토대를 반영한 것으로 본다. 이미 방역에서 차별을 경험한 전장연의 이동권 확보 투쟁이 지하철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 요구투쟁으로 축소되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허약한 인권의 토대는 협소한 권리의식과 불평등한 제도를 포함한 다양한 현상으로 표출된다. 가깝게는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공적마스크 배분, 재난긴급지원금 지급, 코로나19 진단검사, 재난정보 제공, 의료서비스 공급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한 차별도 다름 아닌 그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한 지방정부의 인권전담부서, 인권보호관, 인권위원회, 인권센터 등은 바로 이 구조에서 연유하는 차별과 인권침해의 문제에 대응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권행정시스템이다. 더 나아가서 취약한 인권의 토대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 역시 인권행정시스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유행에서 드러난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들은 기존의 취약한 인권의 토대가 감염병 위기상황에서 결합되고 심화된 것들이었다. 가령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16개국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자국어로 된 코로나 감염예방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 부서에서 맡아야 할까? 노숙인들의 노동참여와 자립을 담당하는 자활지원과에서는 감염병에 취약한 노숙인 주거환경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인권행정시스템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기존의 분절적이고 수직적인 행정업무에 개입하고 역할을 조정하여 인권을 고려한 행정이 실현될 수 있는 방안을 권고할 수 있어야 했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표준인권조례안을 권고한 이후, 많은 지역에서 인권조례를 제정하고 인권전담부서, 인권보호관, 인권위원회, 인권센터 등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제대로 운영되는 지자체는 소수에 불과하고, 위상과 역할에서도 차이가 크다(기사 바로가기). 그나마 국가인권위원회는 독립적인 국가기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지자체의 인권전담부서나 인권보호관은 일반행정체계 내에 하나의 조직으로 편제되어 있기 때문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고유한 인권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힘든 실정이다. 또한 지방정부의 인권위원회는 비상설기구로 운영되다보니 지자체의 행정 결정에 대해 적극 권고하고 시정 조치를 내릴 수 있는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지방정부가 수행해야 할 인권업무를 민간복지재단 등에 인권센터 형태로 위탁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정부 부처에 인권 문제에 대한 권고를 할 수는 있지만 정부 부처가 이를 수용하지 않는 경우 후속 조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뿐만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 침해 사실을 방조하거나 인권 문제를 취사 선택하며 국가권력의 입장을 대변할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상 행정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문제를 포함한 인권과 관련된 모든 이슈를 인권행정시스템이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인권 담론의 국가 독점은 오히려 취약한 인권의 토대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또 하나의 구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권행정시스템의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국가는 인권조차도 통치의 언어로 배열한 적이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였다. 그래서 지난 논평에서도 우리는 인권은 국가권력에 기대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획득하고 강화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설령 인권행정시스템이 잘 작동한다 해도 평화의 위기, 민주주의의 후퇴,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의 확대, 불공정한 사법체계 하에서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권의 토대를 넓히고 이를 두텁게 하는 과정은 평화, 민주주의, 사회 정의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별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 집권 여당이 될 공당의 대표가 행하는 나쁜 정치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는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람중심의 사회를 위해 굳게 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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