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일, 46일, 53일. 목숨을 걸고 긴 단식투쟁을 이어가던 세 사람이 건강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어서야 단식을 중단했다.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긴 차별금지, 노동권 등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세상에 알리고, 지금 이곳이 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나아지길 바라는 몸짓이자 호소였다. 그들의 호소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결국 회신을 얻지 못했다.
42일과 109일.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는 21년의 외침에 대해 기획재정부의 명시적인 책임을 촉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삭발투쟁과 혜화역 선전전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 출근시간을 지체시킨다는 거친 힐난을 감내하면서 오체투지로 지하철에 올라타며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알리고 있다.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삼는 이들의 투쟁은 가장 절박하다. 그 몸을 내놓기 전에 할 수 있는 만큼 분주하게 사람들을 만났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수많은 말을 해야 했고, 때론 부딪치며 다투느라 이미 그들의 몸은 앙상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어쩌면 그런 줄도 모르고 다시 대오 앞에 섰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일으켜 세워 이야기를 들어야 할 책임자들은 관조적이다.
전부를 드러낸 사람의 몸과 보이지도 않고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는 권력과의 극도로 비대칭적이고 비인간적인 구조. 곡기를 끊고, 삭발을 하고, 장애를 드러내며 주장하고 호소하여도 꿈쩍하지 않는 그 체계가 확인된 이상 우리는 더 준엄하게 국가와 정치의 역할을 묻는다.
차별 금지, 장애인 이동권, 노동권 보장에 대한 요구는 특정한 소수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편협한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 모두가 일상과 생애에 걸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먼저 확대하고 보호해야 할 영역이다. 중앙과 지방정부가 따로 책임을 나눌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를 바로 앞둔 뜨거운 정치의 계절이지만,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후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응답하지 않는 정치를 우리는 그냥 두어도 될 것인가.
이 시대의 정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권위있는 배분’이라는 그 본령을 회피하고, 주체와 권한이 모호한 사회적 합의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나중으로 미루고, 기다리라 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제풀에 지쳐 그만두기를 바라듯 시간을 끌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갖는 잠재적 편익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용인함으로써 기득권층의 편익을 유지하는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고 있다. 급기야 지금의 정치는 차별 없고 평등한 시민사회를 위한 삭발과 단식에 화답하는 대신 지방선거라는 공간을 활용하여 오히려 개별적 욕망을 추동한다.
지방선거에 즈음하여 ‘주거’를 다루는 거대 양당의 행태를 보라. 주거와 관련된 시민들의 고통에 대하여 진지하게 소통해야 할 정치의 자리에는 규제 완화와 세제 감면, 투기적 토건개발에 대한 약속이 홍수를 이룬다(참여연대 6·1 지방선거 주거·부동산 공약 평가 결과). 주거의 공공성이 논의되어야 할 자리에서 ‘지역 간, 계층 간 주거의 격차 확대 방안이 ’지방정치’라는 외피 속에서 공공연하게 주장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가중된 식량안보의 위기나 재앙적 기후변화에 대한 대안은 지방정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문제의 성격 상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사회구성원들의 삶과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격차를 확대할 것이 분명하지만 지방선거는 오히려 지방정치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보이는 지금의 힘의 관계에서는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정치의 무응답을 용인하는 정치라면 그런 정치는 종식되어야 한다.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책무를 정치의 본질로 여기는 정치권력을 만들어내고, 그 정치권력을 시민사회가 통제하도록 해야 한다.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선거라는 일정과 관계없이 시민들의 참여와 연대가 지속되고 강화되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