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소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직업건강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대체로 여성과 남성이 직장에서 유사한 경험을 공유한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유급 노동은 직업성 사고처럼 직접적인 방식이든, 수면 방해같이 간접적인 방식이든 건강에 영향을 끼치고, 실업은 더 나쁜 건강상태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특히 직업건강연구의 오래된 통념인 ‘건강한 노동자 효과’는 고용된 인구가 일반 인구에 비해 사망률이나 질병 수준이 더 낮게 나타난다고 본다. 심각하게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 등 건강상태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고용에서 배제되거나 일찍 퇴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노동 경험이 다르다는 연구들이 증가하고 있고 특히 지난 몇십년 간 여성의 유급노동 참여는 늘어난 데 비해 무급노동(가사, 돌봄 등)에 대한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업건강 연구의 오래된 통념이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제 학술지 <비판공중보건>에 실린 미국 인니애나대학교 아호넨 교수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는 유급노동과 건강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에서 무급 노동의 역할에 대한 탐구가 적었다는 데 착안했다. 그리하여 미국 여성들에게 있어 평생에 걸쳐 수행한 유급 및 무급 노동이 노년기 심혈관 건강에 미치는 역할을 분석했다(논문 바로가기☞ 젠더화된 노출: 미국 여성의 심혈관 건강에 평생 동안의 유급 및 무급 노동이 갖는 역할에 대한 탐구).
연구팀은 50-79세 완경기 여성에 대한 전향적 코호트 연구인 여성건강계획관찰연구(Women’s Health Initiative Observational Study)를 이용하였다. 1993년~1998년 사이에 이 관찰연구에 등록된 이들 중 68,615명의 유급노동 참여 이력과 출산 이력, 그리고 2017년까지의 심혈관계 질환 발병과의 관계를 콕스비례위험모형을 통해 분석했다. 유급노동 참여 이력은 ‘직장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란 질문을 바탕으로 다섯 개의 범주로 분류했다. 성인기 내내 지속적으로 유급노동을 해 온 집단, 노동시장을 일찍 떠난 집단, 노동시장에 늦게 진입한 집단, 불연속적인 노동 이력을 가진 집단, 가정 밖에서는 노동을 하지 않은 집단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생애과정 중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소위 ‘핵심생산인구’라 불리는 청장년기 당시 무급노동의 여부를 추정하기 위해 출산 이력을 사용했다. 출산을 한 여성들이 이후 자녀를 양육하는 노동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서다.
연구 결과, 출산을 하지 않은 여성들에서 유급노동 참여 이력의 차이는 노년기 심혈관계질환의 위험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출산을 한 여성들에서는 노동시장을 일찍 떠나거나 불연속적인 노동이력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지속적으로 유급노동을 해 온 사람들이 높은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을 가졌다. 즉 청장년기 여성의 노동이력과 노년기 심혈관계 질환의 관계는 노동이력의 차이 그 자체(유급노동에의 종사 여부, 지속성, 노동시장을 이탈 및 진입한 시기) 보다는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을 함께 수행한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났다. 성인기 내내 단절없이 유급노동을 하면서 무급노동을 함께 수행한 여성들의 건강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노년기가 되었을 때 더 나빴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고용된 사람들의 건강 수준이 일반 인구보다 좋다는 건강한 노동자 효과가 여성에게서는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이러한 결과를 역할과 시간이라는 두 차원에서 해석했다. 가정 내 ‘아내’, ‘어머니’, ‘딸’과 직장에서 ‘노동자’의 역할은 상반된 기대를 불러오고 두 영역 모두에서 역할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가정에서는 유급노동으로 인해 가족 돌봄과 관련된 역할 기대치를 훼손한다고 비난받고, 일터에서는 직장에 완전히 헌신하는 이상적인 노동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비난받는다. 이는 종종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 더 길게 일함으로써 이러한 훼손된 기대를 벌충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이에 시간의 부족을 고착화하기도 한다. 시간의 부족은 운동, 건강한 음식 섭취, 충분한 수면, 휴식 등 건강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하지 못하게 하며,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의 혼합된 책임감에 대한 부담으로 늘 시간에 쫓기거나 나쁜 건강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구팀은 여성의 ‘일’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할 때 유급노동 뿐만 아니라 무급노동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여성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반영할 뿐 아니라 노동의 건강 영향을 더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그간 노동시장, 일터, 가족과 관련된 정책과 담론들은 유급노동 외의 영역에서 ‘방해받지 않는’ 남성 생계부양자를 가정한 모델에 주로 의지해 왔다. 그리고 이는 여성의 유급노동 참여에 대한 지원을 개별 여성 및 그의 가족에게 요구하거나 여성에게 피상적인 사회적, 제도적 지원을 제공하도록 초래했다. 노동과 건강에 대한 연구모형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는 여성의 일과 관련된 건강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충분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덧붙여 이 연구는 ‘진짜’ 일과 무급노동의 분리가 인구 건강에도 함의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분리는 사회, 직장, 가족 내에서의 자원, 자율성, 자기 결정권 및 권력에 차별적인 접근을 가져오며 이는 건강에도 영향을 끼친다. 결국 일과 관련된 현재의 지배적 담론과 제도에 균열을 내지 않는 한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을 저글링하듯이 수행하는 여성의 건강은 계속 위태로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서지정보
Emily Q. Ahonen, K. Fujishiro, S. Brown, Y. Wang, A.J. Palumbo & Y.L. Michael (2022). Gendered exposures: exploring the role of paid and unpaid work throughout life in U.S. women’s cardiovascular health, Critical Public Health, 32:3, 357-367, DOI: 10.1080/09581596.2020.1854183
World Health Organization(2006). Gender equality, work and health: a review of the evidence. World Health Organization. https://apps.who.int/iris/handle/10665/43311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